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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비] 태세전환의 미학

최종 수정일: 2022년 2월 18일



오래 전부터 나를 고민하게 했던 주제가 하나 있다. 사람은 줏대가 있어야 하는가, 내지는 주관이 뚜렷해야 하는가? 모두가 ‘예스’라고 말할 때 ‘노’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가? 곱씹어보면, 나는 토론이나 회의가 있을 때 잘 끼어들어서 내 의견을 말할 줄 모른다. 성정이 수줍어하고 과묵하다기엔 그럭저럭 수다도 잘 떠는 편이다. 그렇다고 주어진 토픽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다. 중재자의 역할을 자처하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봐도 다양한 의견이 오가는 와중에서 내가 침묵을 지키는 건 ‘줏대가 없’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 것에 비하면 자주 듣는 말이 ‘너는 참 한결같다’는 것인데, 그러면 한결같이 줏대가 없다는 뜻인가? 나는 또 그게 틀린 말은 아니니 허허 웃으며 맞다고 한다.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아직 한 자도 안 썼지만)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것이 이런 부분이기도 했다. 글을 써서 피드백을 받으려고 하면 동료들이나 교수님들은 항상 ‘네가 말하고 싶은 게 뭐야?’라고 되물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글이 써져 있는 한에서야 최선을 다해서 조언이나 충고를 해주겠지만, 적실하게 도움이 될 결정적 피드백은, 정신없이 받아 적기만 했던 문장들을 한참이나 헤집어 겨우 알아챌 수 있으면 다행이겠고, 보통은 이렇다 할 수확 없이 다시 미로 같은 행간을 헤매야 할 뿐이다. 그러니까 문제라고 생각하는 무언가가 있긴 있는데 그걸 포착했으니 이제는 그걸 도대체 어떻게 써먹어야겠냐, 하는 고민일 테다.


그러나 소위 ‘줏대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 변명을 해보자면 나는 아직 제대로 본 게 없는데 어떻게 말하고 싶은 결론이 생기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말하고자 하는 바’와 내가 생각하는 그것 사이에는 다른 결과 맥락이 충분히 존재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게 정말이라고 한다면 나는 아직 이 둘의 차이를 구분할 정도로 무르익은 ‘대학원생'은 아니지 싶을 뿐이다.


그 간극을 절감했던 것은 논문 작업을 위해 인터뷰를 진행하는 와중이었다. 나는 분명 내가 이 글을 어떻게 결론 내려야겠다, 하하 이게 관점이고 줏대라는 것인가? 자랑스럽게 여기고 여러 질문 거리를 적어 현장에 갔는데 웬걸, 연구참여자들은 (과장을 섞자면) 단 한 번도 내가 예상했던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내가 생각했던 결론으로 달릴 수가 없는데, 그렇다고 이 모든 걸 편집·왜곡하여 원하는 대로 끌고 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며 머리를 싸맨 기억만이 내 모든 논문학기를 지배하게 됐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내가 엉성하게나마 엮어놨던 논리의 줄기는 조금씩 침식됐고 그러면 또 방향을 바꾸고, 바꾸고. 반복되다보니 나중에는 그냥 공부를 손에서 놓아버리는 시기가 오고야 만 것이다. 목젖에 걸린 알약처럼 시원하게 삼켜지지도 않고 속절없이 쓴 맛만 퍼뜨리는, 너 그러다 논문 못 쓴다, 는 교수님의 말씀.


그러나 다시 똑같은 자리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길은 단 하나. 계속해서 수정하고 바꾸고 뒤집어 보고 또 탐색하는 것뿐이다. 이미 알게 된 것이 모르는 것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 ‘말하고자 하는 바’에 확신이 없고 자신감이 없고, 그것을 이야기할 용기가 없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알지 못하면 말하지 못하는 소심함으로 비쳐질 수도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얼기설기 구멍이 숭숭 난 채로 말려 있는 내 목소리를 타인과의 적극적인 교류를 통해 예리하게 다듬고 각을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분명 후회하고 말 것임을 안다(이 등록금 내고).


그러면 하는 수 없다. 어차피 진실은 있어도 진리는 없는 것 같으니. 논리가 어설프다든지 글을 못 쓴다든지 말을 못한다든지 반박을 당한다든지, 하물며 내가 완전히 틀려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목소리를 내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어쩌면 줏대가 없다는 나의 판단은 내가 혹 옳지 않을 수도 있음이 공개된다는 사실이 두려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금 이마저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애진작 수렁으로 굴러 떨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누군가는 우디르급 태세전환이라 농담을 던지겠지만, 수긍하고 변하고 달라지는 것이 무엇이 나쁜가? 그것 또한 용기가 아니겠냐고 이야기해보고 싶다.


...그래도 이건 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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