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준] '박지현'을 못 잃는 아저씨들



칠 년 전 한국의 모 중년 논객은 엠마 왓슨에게 일간지의 연재 코너를 빌어 편지를 보낸다. 공론장은 매서운 비판으로 응답했다. 자신이 지닌 위치성을 망각한 채 젊은 여성에게 뻔한 조언을 건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해당 논객의 편지는 ‘아저씨적인 폭력’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자 맨즈플레인의 대표적 예시로 언급되었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레베카 솔닛). 여기에 덧붙여 남자들은 젊은 여성에게 더더욱 그렇다.


몇 해가 지난다. 이번 표적은 외국의 배우가 아닌 한국의 젊은 여성 정치인이다. 올해 대선 이후 더불어민주당의 박지현 전 비대위원장이 공적인 메시지를 내어놓는 날이면, 나는 SNS를 비롯한 모든 매체로부터 눈을 감고 싶었다. 그를 향하는 무수한 조언들, 담벼락을 수놓은 상소문들을 보는 일이 피로했고 때론 메스꺼웠다. 내용 보다는 형식과 스타일의 문제였다. 따뜻한 마음으로부터 출발하여 정치신인을 원하거나 질타하는 글들 역시 있었을 게다. 허나 정치신인을 향해 이토록 수많은 고언들이 짧은 기간 내에 무구하게 쏟아진 건 특징적이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스스로를 열성 지지자나 팬덤과는 분리해 설명하며 박지현을 ‘미성숙한 다만 의지는 충만한 젊은 정치인’으로 평한 아저씨들이었다. 아저씨들은 말하길 멈추지 않았다. 노골적인 조롱조의 논평 역시 보였다. TBS<정준희의 해시태그>의 6월 24일자 방송에서 정준희 교수는 ‘이준석이 칼이라면 박지현은 스스로 칼 인 줄 아는 자의식 강한 이쑤시개’라 말한다. 잠깐 함께 보자.


“이건 뭐라고 해야하나 이쑤시개 정도인데, 이준석 대표랑 비교하면. 아픈데 찌르면 피나는 정도의 도구에요. 이쑤시개인데, 이쑤시개가 자의식 과잉이에요 (자신이 칼 인줄 아는) 네. 그런데 이걸 가지고 누군가가 쥐고 있어요. 또는 이걸 가지고 찌르는 것들이 도움이 되는 게 있어요, 당내 역학관계에 있어서. 그러니까 거기에 눈에 안보이는 세력들이 붙어있는거에요.”


그들의 즐거운 농담 속에서 젊은 정치인이란 행위자성을 잃은 장기판의 말 같은 도구적 존재이고 그건 정치판 속 젊은 여성이 처한 실존적 조건를 반영하는 비유일지도 모르지만, 동시에 대상의 조건과 역량을 다시 경계짓는 형성적인 그리고 저급한 담론정치의 한 측면 역시 보여준다. 물론 정치인 또는 공인이란 언제나 날카로운 비평과 비평의 대상이 되어야 하리라. 그러나 다른 때에는 입을 슥 다물다 젊은 여성을 향해서만 그 원칙을 들어올린다면 민망스러운 일이다.


신기하다. 아저씨들에게 박지현은 실로 다양한 차원에서 문제적이다. 박지현에겐 내용이 없고, 박지현은 뿌리깊은 계파갈등 속에서 이용당할 뿐이며, 박지현은 선거 등의 ‘정치공학’을 모른다고 말이다. 이토록 영민하고 민감한 감수성을 지닌 아저씨들이 한국 정치판에서 얼마나 힘들었을지 눈물이 날 지경이다. 한국사회를 진단한 정치비평의 고루한 각본들을 손에 쥔 채 짐짓 영민한 체 말하는 아저씨들, 그러나 아저씨들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박지현에게 나의 비평은 왜 이리 쉬운가. 왜 이리도 나는 박지현을 비평하고 싶은가. 안타깝게도 아저씨들에겐 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역량이란 없다. 그것이 코미디이고 징후적이다.


박지현은 이쑤시개라는 그들만의 ‘즐거운’ 비유 뒤에, 갑작스레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또 다른 패널이 묻는다.이거 우리가 보고 있는 문제가 빙산의 일각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거 이쑤시개 쥔 사람 끌어내야 할 거 아니에요. 비유, 조롱, 웃음으로부터 고민과 성찰로 한달음에 이동하는 이 과정은 놀랍겠지만 부조리극이 아니라 금요일 오전 TBS를 통해 방영되는 프로그램이 지닌 내러티브다. 방송 속 세 아저씨의 나라걱정은 늘 그렇듯 즐겁게 마무리된다. 뭐 어쩔 것인가. 역대급 우울한 대선이라고 떠들던 방송사에서도 개표방송 속에선 후보들이 에스파의 춤을 추지 않았나.


이 아저씨들에게는 몸이 없다. 일상 세계와 실존하는 공간 속에서 스스로의 위치성이 없기에 스스로를 돌아볼 성찰적 계기를 마련하는 일 역시 불가하다. 이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물성이 아니라 담론적 토대 위에서만 발견한다. 나는 86세대 또는 헤게모니네트워크로서 86그룹이 아니고, 그렇기에 나는 여전히 비주류이며, 주변적 위치에 속한다는 자의식. 86세대론과의 담론게임 속에서 일상 속 그들이 지닌 특권과 책임들을 돌아볼 계기란 소거되고, 비주류인 쿨한 나, 삐딱선인 나를 누구에게든 거리낌 없이 비판의 칼날을 겨누는 ‘정신’의 현현처럼 여긴다. 아저씨들의 자기인식과는 달리 실상 그들은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만을 겨눈다. 86세대로부터의 열패감을 나르시즘으로 소화한 아저씨들은 무얼 원할까. 86세대가 연령코호트보다는 지배집단 그룹에 가깝다는 걸 알아차린 아저씨들은 형용모순적 존재가 되는 것을, x세대 출신의 최초 86세대가 되는 것을 욕망하고 있을까. 모를 일이다. 몸을 잃어버린 또는 몸을 감춘 아저씨들의 정신은 오늘도 열심히 나라걱정 중이다.


최근 개봉한 <탑건>과 톰 크루즈를 향한 한국사회의 환호는 박지현을 못 잃는 우리 아저씨들의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삼십 육년을 거슬러 예순 한 살인 배우의 몸으로 다시 등장한 피트 미첼은 여전히 세단이 아닌 가와사키 H2바이크를 몰고, 그가 또는 인간 파일럿이 전투기에 올라타야 하는 이유를 몸으로 증명해낸다. 스크린타임 내내 톰 크루즈의 ‘하드바디’는 여전히 바이크를 몰고, 자식 뻘의 조종사들과 해변에서 럭비를 즐기며, 열 배의 중력을 가뿐히 견뎌낸다. 온전한 몸적 존재로서의 아저씨, 그건 스스로의 몸과 물성을 잊은 ‘말만 하는 아저씨의 사회’가 지닌 컴플랙스이자 상징적 해결을 체현한다. 다시 만난 톰 크루즈와 F-14전투기가 반갑더라도, 아저씨들이 영화의 스펙터클 뿐 아니라 서사도 되뇌어 주시면 좋겠다. 정신적 아버지가 되는 일로부터 함께 몸으로 뛰는 일로, ‘대부(代父)에서 동료’로 피트 미첼이 했던 선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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