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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태준] <금쪽같은 내 새끼>의 정치적 무의식

최종 수정일: 2022년 2월 18일



매주 금요일 저녁 채널A에서 방영중인 육아예능 <금쪽같은 내 새끼>는 ‘오은영’이라는 전문가가 등장해 아이의 ‘문제행동’을 관찰하고 이를 교정할 ‘해결책’을 내놓는 육아솔루션 프로그램이다. 그 구성과 출연진에서 지난 시절의 육아솔루션 프로그램인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떠올리게 만드는 <금쪽같은 내 새끼>는 그러나 좀 ‘특별한’ 서사구조가 육아솔루션 프로그램에 결합한 형태다. 매회 서로다른 ‘문제점’을 지닌 아이들이 등장하고 그때마다 전문가는 각기다른 원인과 해결책을 제시하지만, 이는 일정한 서사적 형식 위에서 이뤄진다.


서사적 형식은 다음과 같다. 하나, 프로그램은 아이가 문제적인 행동을 보여준다. 둘, 전문가는 문제적 행동은 부모의 ‘잘못된’ 육아로 인해 발생한다고 이야기한다. 셋, 부모는 스튜디오에서 관찰카메라에 담긴 자신의 ‘잘못된’ 육아행동을 보고, 아이를 대하는 방식이 그릇되었음을 반성한다. 넷, 전문가는 솔루션을 내놓는다. 마지막으로, 아이는 문제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진짜 이유’를 고백하고, 부모는 다시한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다. <금쪽같은 내 새끼>는 부모의 ‘잘못된 행동’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반복되는 ‘반성’의 장치를 마련하여 자식을 향하는 부모의 사랑을 강조한다. 문제는 ‘도덕’이 아닌 ‘지식’이 되고, 부모는 비록 행동은 잘못되었을지라도 이들은 모두 마음으로 내 자식을 ‘금쪽처럼’ 귀하게 여긴다.


때문에 ‘우리 아이가 달라졌다’는 비포애프터와 문제행동에 관한 기능적인 해결 만큼이나 전경화되는 것은, ‘내 새끼'를 향한 부모의 사랑이라는 휴머니즘 서사다. 이 휴머니즘 서사는 육아솔루션 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금쪽같은 내 새끼>가 금요일 저녁 8시라는 ‘프라임타임’에 배치될 수 있는 이유다. 그리고 아이의 돌봄을 둘러싼 문제를 발화하는 과정에서 한계가 명확해지는 이유기도 하다. 힘을 주어 ‘부모에겐 죄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이 프로그램은 ‘다만 몰랐을 뿐’을 그 뒤에 붙이고, 사회적인 계기들을 사라지게 만들며 아이를 돌보는 능력을 개인이 ‘계발’할 것을 강조한다.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은 ‘개인’의 단위로 내려오는 한편, 동시에 ‘아이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자연적인 것으로 정초된다.


아동은 생애주기 내에서 언제나 있었던 자연적 범주가 아니라 근대 이후 등장한 역사적 개념이고(필립 아리에스), 문화적 재현물 속 아이에 대한 사랑은 일면 자본주의와 이성애의 풍요로운 내일에 관한 ‘재생산적 미래주의’적 혐의를 지닌다는 지적(리 아델만)을 고려하면 <금쪽같은 내 새끼>는 허위의식으로서 이데올로기적 텍스트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을 온전히 닫힌 텍스트로, 상징적인 봉합이 완전하게 이뤄진 텍스트로 갈음할 수는 없다. 그들의 일상, 프로그램 내에서 부각되지 않지만 삭제할 수도 없는 흔적들이 이따금 기괴하게(Uncanny) 찾아오기 때문이다. 관찰카메라의 구석에 담긴 빛바랜 가구와 옷, 불평등하게 분배된 육아의 몫, 이른 새벽 출근해 자정이 가까워 퇴근하는 부부와 돌봄의 공백으로서 ‘아이들만이 남겨진 시간'의 흔적들. 많은 TV프로그램들이 그렇듯 이따금 새어나와 계층, 계급, 성별에 따른 불평등을 암시하는 증상(Symptom)을 포함한 텍스트로서 <금쪽같은 내 새끼>의 내부에는 스스로의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내는 요소들이 있다


한편, 기능적 솔루션에서 ‘서사’로 프로그램의 무게중심이 이동할 때 생기는 가능성 역시 있다. 동시대의 이데올로기적인 봉합과 유토피아적 열망 사이에서 서사가 생성된다고 할 때,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어린이’란 실체로서 어린이임과 동시에 오늘날 총체적인 것으로서 사회에 접근할 수 있는 알레고리다. 우리는 어린이를 통해 ‘나’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부모의 돌봄이 부재한 아이의 문제는 사회적 안전망이 민영화된 시절의 민중의 삶으로, 인정에 인색한 부모는 사회적 모욕과 낙인을 승인하는 시스템으로 다시금 읽힐지 모른다. 아이가 된 우리는 우리는 변화를 원한다. 부모의 얼굴을 한 상징적 질서는 ‘금쪽같은 너에게’ 사회적 불평등과 모욕이란 실수였다고 사죄하고, 그 끝에 ‘기능적’ 대안을 약속할지도 모른다. 허면, 어른들의 사정 바깥에서 우리는 약속을 웃으며 반기지도 거절하지도 못한 채 어색하게 웃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건 <금쪽같은 내 새끼>의 정치적 무의식 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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