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번 칼럼 시리즈에서, 학문 장에서 요구되는 상징자본이나 모종의 필요조건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스스로가 느끼는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인 불일치감이나 부조화에 대한 감각을 일종의 ‘디스포리아’로 간주하고 여러 방향으로 겹쳐 그 감각들을 풀어내 보고자 했다. 첫 번째 주제는 전문인으로서 연구자에게 요구되는 ‘언어적 능력’에 대한 개인적인 차원의 감각이고, 두 번째 주제는 학문 장에서 구성되거나 누락되는 ‘계급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었다. 이제 마지막으로는 연구자, 특히 문화연구자들과 같은 학제적 연구자가 살면서 겪는 ‘이론 찾아나가기’의 어려움에 대해 설명해보고자 한다. 이 주제는 사실 하나의 분과학문을 초월하는 학제적 연구를 수행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분과학문 중심의 학문체계 속에서 겪는 시스템적인 문제와 더 깊이 결부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생래적인 차이를 가진 문화-신체가 장의 지배적 논리와 충돌하여 빚어지는 ‘불쾌감’보다는 불일치나 막연함의 감각,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지 방향을 잃은 듯한 감각과 연결될지도 모르겠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고유의 이론의 ‘나무’를 가지고 있다. 비유적인 이미지이지만 이것은 내가 관심있는 주제에 대하여 글을 쓰고 사유하기 위해 끌어올 수 있는 이론적, 방법론적 자원들의 계열과 묶음, 관계도를 말한다. 학교 공간에서 공부하는 구성원에게 제도화된 분과학문이 제공하는, 국문학의/역사학의/사회학의/인류학의/언론학의 개론과 방법론 수업은 나무를 그릴 수 있는 도화지를 1차적으로 제공할 수 있다. 그 중에서 나의 연구관심사에 부합한 문제의식이나 주제들이 결정되면서 가지들이 하나씩 하나씩 솎아지거나 추가된다. 혹은 거꾸로 연구자 자신의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도출된 연구관심사나 생애를 관통하는 문제의식들이 어떤 토양으로서 먼저 존재할 수도 있다. 두 가지 경우에서 모두 이론의 나무는 경험으로서의 토양과 계속해서 상호작용하고 질문이나 불만이나 화답을 던져 가며 구성된다.
나의 경우에 이 나무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상당히 느렸다. 정확히 말하면 이걸 키우는 게 왜 필요한지도 잘 몰랐고 키우는 법도 잘 몰랐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나에게는 경험세계로부터 도출된 구체적인 문제의식들이 (막연한 형태로나마) 먼저 존재했었고, 그래서인진 모르겠지만 이론을 나의 문제의식을 해결하기 위한 보조적 수단으로 생각하는 태도가 먼저 있었다. 아주 막연히 '이론보다 현실이다' 혹은 '이론을 넘어 현실로 가야 한다' 등등의, 다소간은 적대적인 관점에서 이론을 대하기도 했다. 이론은 교과서에서나 배우는 낡고 정지된 것이며, 적절한 때에 수단으로 삼아 활용하면 그만이라는 관점. 이론을 경험연구 못지않게 정교화해야 한다는, 동시에 그 이론이 항상 어딘가에 적절히 ‘쓰일 수 있어야 한다’는 스튜어트 홀의 입장에 따른다면, 이러한 관점은 절반만 맞는 것이다. 수업과 세미나에서 이론을 다시 읽고 배우면서 느끼는 점은 이론에 대한 그간의 나의 태도가 '이론 대 현실'이라는 대립적인 이분법에 근간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론이야말로 아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맥락으로부터 출발하는 개념임을 느끼게 된 것은 이론가의 삶과 그의 문제의식과 나를 겹쳐 보는 형태의 독서를 하면서부터였다. 이론가의 동인, 글쓰기의 맥락, 이론가가 반영하거나 번역해내는 현실의 시공간을 통해 구성되는 문제의식과 이론은 분리될 수 없고, 그것은 시공간을 굴절하는 마디마디마다, 혹은 내게 닿아오는 순간마다 끊임없이 번역과 대화의 여지를 남긴다. 이론의 원서를 읽는 순간에도 그 속의 개념이나 모델은 내게 친숙한 현실의 어떤 유사형태 속에서 펼쳐지면서 이해된다(이건 누구나 불가피하게 그렇지 않을까 싶다). 그의 이해와 나의 이해가 만났을 때, 혹은 그의 시대의 어떤 역사와 나의 역사가 만났을 때 부딪는 가능성들을 생각할 때, 이론의 이해와 독해는 더이상 정태적인 차원에만 있지 않다. 이론적 고민은 곧 현실 속에서 '(정치적) 전망'을 사유할 가능성과 연결되고, 그런 점에서 나에게 벼려야 할 어떤 사유의 무기 같은 것을 주고, 경험들을 돌아보고, 상처를 치유하는 가능성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내 안과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파악하고 싶어서 ‘이론’으로 왔으며, 그때 이론에서 치유의 공간을 발견했다는 벨 훅스의 이야기는 이런 관점에서도 이해해 볼 수 있다.
다시 돌아와서 이야기하자면, 이런 관점에서 이론의 나무를 그려가기 위해 자원들의 지형도를 탐색하는 것이 공부를 하는 동안 연구자로서의 나에게 주어진 과제가 되었다. ‘디스포리아’의 문제와 이 주제를 결합시켰던 이유는, 그 나무를 그려나가는 과정이 대학에서 분과학문의 세부전공으로 문화연구를 공부하던 나에게는 지나치게 막연하고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문화연구를 포함하여, 특히 특정한 분과에 소속되지 않는 학제적 연구를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론의 매핑’이란 난감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선택할 수 있는 자원이 지나치게 많거나, 너무 없기 때문이다. 혹은 밑그림을 그려나가기도 전에 부딪치게 되는 다른 문제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문화연구의 경우, 분과학문 내부에서 시작하게 된다면 제일 먼저 내 전공과 연결된 개론 수업과 방법론 수업을 찾아 헤매야 하고, 이론을 배울 때도 다른 세부전공에서 제공하는 (이를테면 전공필수 수업에서 배우게 되는) 이론의 전제나 자원들과 계속해서 부딪치면서 차이를 감각해야만 한다. 아무도 그 차이를 명확한 형태로는 설명해 주지 않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느끼는 불일치감과, 내가 가용가능한 자원들이 무엇인지, 어디에 얼마만큼 접근할 수 있는지 파악하는 과정은 오로지 세부전공 연구자들끼리 스스로 잘 공부하고 분투해서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된다. 한편, 독립된 문화연구 전공에서 커리큘럼을 수학한다면 수업의 양과 폭이 훨씬 풍부해지고 지형도를 파악하는 과정 또한 비교적 수월해지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문화연구와 관련된 키워드와 연구주제가 매우 다양하고 전공에서 열릴 수 있는 수업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 문제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 만약 공간이나 역사를 연구하고 싶다면, 학생들은 타 학제에서 열리는 관련 주제의 수업들을 찾아 참여하게 된다. 그럼 그 분과에서 지배적으로 활용되는 인식론이나 방법론의 문제들과 또 다시 마주하게 된다. 차이에 대한 감각과 그로부터 자신을 정향하는 과정은 영원히 학제적 연구자의 과제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되돌아와서 질문을 나누어 볼 수 있는 공간’이 있는가와 없는가의 여부는 매우 중요한 차이를 갖는다고 말하고 싶다. 이것은 학제적 분과학문으로서의 문화연구와 학교 밖 문화연구자 공동체 모두를 내가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유 중 하나다).
덧붙이면, 학제적 연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론의 매핑이라는 문제도 있지만 ‘방법론’이라는, 그 자신이 경우에 따라 활용하고 접합시켜야만 하는 문제적 축이 또 하나 존재한다. 늘 자기가 익숙해 있었던 상위 분과의 접근방법이나 방법론을 채택하다가, ‘다른 방법도 있음’을 깨닫고 고민하는 순간이 오게 된다. 그래서 학제적 연구 분야에서 제공하는 ‘질적연구방법론’과 같은 기본 방법론 수업들의 위치와 그곳에서의 토론이 아주 중요해지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그 결과 나의 석사논문에는 ‘이론’에 대한 파트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으며, ‘선행연구’부터 시작되고 있다. 이것은 ‘서론-이론적 논의-연구 방법-본론’ 등으로 이어지는 연구의 정형화된 형태를 넘어서고 싶었던 의도도 있었지만, 동시에 뒤집어 보면 ‘이론’을 내 것으로 만들어 학습하기 어려웠던 나의 상황을 의미하기도 하는 이중의 흔적을 보여준다. 이론을 어떤 의미에서 ‘과소평가’ 했던 나의 태도는, 어쩌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이론의 선택지를 풍부하게 제공받지 못했거나 ‘선택의 방법’을 충분히 학습하기 어려웠던 배경에 따른, 제도화된 문화연구의 ‘효과’ 중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결국 학제적 연구자로서 ‘어떻게 이론의 나무를 잘 그려나갈 수 있는가’,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남게 된다. 계속 이런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스스로 이걸 어느 정도 했다고 말할 수조차도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잘 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참 어렵지만, 시도해봤거나 시도하고 있는 방법들을 적어 본다. 예를 들어, 나는 언론학 전공 내에서 문화연구를 하는데, 공간이나 역사에 대한 연구에 관심이 생겼다. 전공 커리큘럼에서는 이 주제에 대한 강의가 전문적으로 열리지 않는다. 그럼 공간에 대한 이론과 인식론과 방법론의 계열들을 어떻게 알 수 있고, 그 중에 내가 문화연구자로서 공부하고 접근해 볼 수 있는 지류들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자신이 대학 안에 있다면, 자기 전공을 넘어서서 각 학제의 유관 강의들(특히 개론의 형식을 띤 수업들)이 제공하는 기본적 커리큘럼이 참조점을 줄 수 있다. 나의 연구주제나 전공주제와 연결될 수 있는 커리큘럼을 잘 살펴보고, 이 강의가 어떤 문헌부터 시작해서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를 체크해본다. 혹은, ‘자신이 꽂힌’ 좋은 논문이나 저작을 찾아보고 그 문헌의 참고문헌으로부터 스노우볼링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참고문헌의 참고문헌들을 따라가다 보면, 각 연구자의 관점이나 접근에 기반이 되는 원 이론들의 지형도와 만날 수 있게 된다. 자기 전공관심사와 유사한 연구를 하는 교수님이나 조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더욱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세미나나 스터디를 구성하는 것 역시 방법이 된다. 이론의 나무는 절대 수업이나 세미나 하나를 듣는다고 자연스럽게 한 번에 생길 수는 없다. 이론가와 나의 경험, 역사적 맥락을 교차해보고 거기서 접점을 찾아야 한다. 나는 예전 글에서 ‘세미나’가 그 이론가에게 다가가는 나의 고유한 방식을 찾아낼 수 있는 매개가 될 수 있다고 썼던 적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학교 안과 바깥의 학술공동체에서 구성하는 세미나에 여러 번 참여해 보는 것은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다양한 학제에서 공부한 여러 세대의 구성원들이 분명히 도움을 주는 지점이 생겨나고, 또 내가 내 손으로 직접 그려 본 지형도로 읽기를 수행할 기회도 생겨난다.
이론의 나무 그리기는 내가 삶을 살면서 얻게 되는 연구문제가 무엇인지를 구체화하는 과정이고, 거기서 키워드를 도출하고 그 키워드별로 일종의 사전을 만들어두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전들은 명시화되어 있지 않더라도 누구라도 각자 가지고 있는 ‘계정’들일 것이다. 나무의 가지들은 나의 이미지 속에서 키워드별로 ‘나열’되어 있다기보다는, 자신의 문제의식을 매개로 하여 서로 관계적인 이미지를 갖는다. 중요한 것은 독서를 하다 보면 이론가들 사이의 연결고리가 생기게 되거나(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비슷한 얘기를 하는 학자가 정말 많다), 살아가면서 나의 생애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의 키워드가 계속해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부르디외의 ‘장 이론’이 갖는 모빌 구조의 이미지처럼) 새로운 삶의 문제의식이나 키워드가 생겨나게 되면, 이론의 나뭇가지들은 각각 조금씩 변경된 축에 맞추어 이동할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학습을 할 때 각 이론들의 유사성과 차이를 규명하면서 독서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며, ‘처음부터 난 이 이론에만/주제에만 꽂혔다’는 마음으로 선택적 독서나 선택적 환원을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이론의 나무를 구성하는 과정은 제각각 연구자 개인의 궤적에 따라 다양하고 또 정석적인 루트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세포가 지금 이 순간에도 분열하고 운동하듯이 이것은 완결되지 않은 채 매일 매일 끊임없이 구성되는 ‘과정 중’에 있다. 결국 이 나무 그리기의 문제는 누구나 (심지어 학위를 따고 나서도) 아주 오랫동안 처하는 문제가 될 것이다. 최소한 살아서 공부하는 기간 동안, 아주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는 없더라도 내 관심사에 결부된 지형들만큼은 꼼꼼하게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이 나무 찾기는 혼자서만 해야 하는 몫이 아니라, 같이 그려나갈 수 있는 과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이를테면 지수의 나무가 있다면, 선기의 나무가 있고 보영의 나무도 있다. 내가 공부와 세미나를 통해서 학술공동체에서 조금이나마 해 보고 싶은 것은, 각자의 이론의 나무들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찾아나가고 그리기 위한 감각을 같이 계발해 보는 것이다. 일종의 연구문화에서 생성되는, 강의나 수업에서 일일이 다루어 주지는 못할 수밖에 없는 이 이론의 나무를 찾아나가는 ‘생활감각’을 공유하게 될 기회가 좀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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