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동료가 쓴 글인 ‘학회의 효용’의 연장선상에서, ‘세미나의 효용’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을 풀어보려 한다. 보통 인문사회과학계 안에서, 특정한 복수의 텍스트를 읽으며 난상토론을 통해 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돕는 세미나는 학교나 학교 밖 학술공동체뿐 아니라 일반적인 소셜 커뮤니티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연구문화다. (만약 대학 공간 안에 들어와 있다면) 대학원에 입학하기 전에도 책읽기 모임들의 멤버 구인 공고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고 학교 바깥의 여러 공동체에서도 다수의 세미나가 적지 않게 열리고 있기 때문에, 내가 해당 주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일종의 플랫폼이 될 수 있는 학술공동체들을 팔로우하고 있다면 세미나에 한 번쯤은 참여해 보았거나 참여를 고려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세미나의 특성은 강의나 학회에 비해 좀더 틀에 박히지 않은 자유롭고 수평적인 논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기획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읽고 싶은 주제와 텍스트를 선정해서 사람들을 모아볼 수 있고, 참여자의 입장에서는 갓 학업을 시작했거나 주제에 대한 기초 혹은 심층적인 이해를 위해 비교적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미나에서는 텍스트에 대한 독해를 바탕으로 한 참여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좀더 중요해지게 된다(이는 세미나의 운영과 분위기를 결정하는 중요 포인트가 된다). 해당 텍스트에 대한 이해나 질문을 모두가 충분히 잘 공유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텍스트를 넘어서는 범주의 다양한 차원에서 등장하는 구성원 각각의 관심사를 나누고 교류하는 것은 세미나의 이끔이뿐 아니라 참여자들에게도 주어진 나름의 몫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세미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보게 되는 것은, 지금은 여러 가지 세미나를 여는 플랫폼 형태의 연구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한때는 내게 세미나에 참여하는 것이 극심한 심적 부담이 되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사회과학 이론을 읽는 복수의 세미나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당시의 나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나에게 특히 어떤 주제가 문제가 되는지, 이 주제를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의 문제가 불명확한 형태에서 ‘일단은 책이라도 읽어보자’라는 느낌으로 권유에 의해 세미나를 시작했던 것 같다. 분명히 이런 고민들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기에 세미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다른 참여자들과 고민이 잘 공유되었더라면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불행히도 그 세미나에서는 텍스트를 다 같이 꼼꼼하게 읽었어도 특정한 형태의 수용이 아닌 방식들을 ‘오독’이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고, 특히 당시의 나처럼 이 텍스트를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보아야 할지 모를 구성원의 고민은 비교적 ‘논외’로 여겨지는 층위에 있었다. 동기부여가 세밀한 차원에서 되지 않으니 습득하는 지식도 파편적이었고 읽어갈 의지도 높지 않았다. 발제를 맡게 되면 ‘제대로 독해했는지, 읽고 나서 드는 질문이 올바른 형태의 질문인지’를 먼저 눈치부터 보게 되었으며 ‘이런 기초적인 질문을 하면 또 멍청해 보일까, 텍스트를 성실하게 읽지 못했다고 생각하겠지’ 걱정하며 나의 질문을 끊임없이 검열하게 되었다. 그 결과 시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어느 이론가의 책을 읽고 토론을 했지만, 이론가가 대충 무슨 작업을 했는지는 어렴풋이 기억나도 그것을 무엇과 무엇의 사이에서 접근하고 어떻게 고민해야 한다는 내 나름의 방향설정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기억들이 모호하다. 세미나에서 부스팅이 될 만한 상호작용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나 스스로도 그걸 만들 수 있는 감각을 체득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하는 상황이 된 셈이다.
학내에서 소규모 인원으로 구성되는 세미나인지, 학교 바깥의 비교적 넓은 플랫폼을 통한 세미나인지에 따라 이러한 문제들이 발생하는 층위는 달라질 것이다. 주로 학교 안에서 같은 전공의 선후배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학내 연구문화로서의 세미나는, 구성원들이 비교적 비슷한 형태의 목적의식이나 독해방식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이 일치된다면 상당히 신속한 형태의 이해와 논의를 할 수 있게 된다. 반면, 학내 구성원들의 ‘하비투스’라고 할 수 있을만한 특정한 형태의 이해관심의 경향이 형성되어 있거나, 혹여 학내문화가 수직적인 상하관계에 의해 구성되는 구조라면, 비교적 다양한 형태의 질문이 어렵거나 차단될 수도 있다는 단점이 있다.
한편, 학교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세미나는 좀더 수평적이고 다양한 이해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일 수 있기 때문에 부담 없는 참여와 다양한 수준의 이해를 시도할 수 있다. 특히, 자신의 전공에서는 마이너했던 주제를 기획하거나 텍스트를 접하는 데 있어서 학교 밖 플랫폼을 통한 세미나는 매우 효과적인 기회를 제공한다. 다만 구성원의 여러 이해관심사나 이해도가 세미나에서 만들어지는 이해나 토론의 방향들을 쉽게 정리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이끔이뿐만 아니라 참여자 각자의 관여와 교류가 특히 중요해지게 된다. 요는, 제도권 안에서 학업을 시작하는 학생이 세미나를 고려하고 있다면 결국 두 가지 형태의 참여가 모두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좋은 세미나를 만드는 것은 연구문화의 구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하지만, ‘다학제적 읽기’- 즉 사회이론이나 문화이론가의 작업을 공부할 때 분과별로 상이한 이론의 ‘수용’ 양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뛰어넘을 기회를 마련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문화연구를 포함해 다양한 학제에서 수용되고 있는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논의는, 어떤 분과의 제도권 커리큘럼에서는 주로 ‘교육’의 측면에만 할애되어 있고, 어떤 분과에서는 오직 ‘예술생산 장’의 논의에만 집중되어 있다. 그렇기에 부르디외의 텍스트로 세미나를 꾸리고 여러 구성원들과 다학제적 읽기를 한다면, 특정 학제에서 한정적으로 수용되는 주제들을 넘어서서 이 이론가 개인이 추구하고자 했던 모종의 ‘종합적인 실천 감각’과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된다. 무엇이 이 사람의 문제의식이었고 그것이 자본에 대한 문제나 교육, 예술과 어떻게 결합하는지, 그리고 ‘그 문제의식이 나의 연구주제와는 어떠한 방식으로 공명할 수 있는지’를 성찰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즉 세미나는 어떤 이론가에게 다가갈 ‘나의 방식’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계기를 제공하며, 이는 단순히 수업에서 주어진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 층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여러 학제에서 서로 다른 다수의 사람들이 번역을 수행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무수한 오역에 대한 교정 효과는 덤이다.
마지막으로, 세미나만큼 중요한 세미나 이후의 네트워킹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내가 세미나의 뒤풀이에 언제나 즐거이 참여하는 것은 딱히 술을 좋아해서만은 아님을 고백한다). 세미나 중간이나 종료 후 작은 식사나 뒤풀이 자리를 통해서 교류하고 피드백을 받는 작업 역시 매우 중요하다. 이끔이에게는 당연히 향후의 다른 기획들에 대한 참조점을 만들 기회일 것이고, 세미나 참여자의 입장에서는 (개인적인 경험에 따르자면) 구성원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내가 추후 다른 세미나들에 참여할 때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는 것이 좋을지, 텍스트를 어떤 방식으로 읽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고민을 나누고 감을 잡아볼 수 있었다. 개개인마다 판단기준이 다를 수 있겠으나, 내가 세미나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은 바로 이러한 상호작용에 의거한 네트워킹을 잘 이용하면서 자신의 ‘학문하기’에 대한 구획을 잘 그려나가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코로나로 인해 많은 세미나들이 비대면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대면 세미나만이 가지고 있는 그 풍부한 비언어적 상호작용들을 곧 다시 누릴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도 이번 여름에 연구원과 회원들이 이끔이가 되어 8개의 주제로 세미나를 연다. 관심이 있다면 망설임 없이 참여하시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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