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 학문 장에서의 ‘디스포리아’ I: 발표공포증과 언어적 전문성

최종 수정일: 2월 18일



이번 칼럼과 다음 칼럼에는 공부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겪는 개인적인 모종의 ‘불화감’들을 설명해보려 한다. 이는 학문 장에서 통용되는 상징자본이나 장의 논리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으며, 아주 신체적인 형태의 불화감일수도 있고 문화적 불화감일 수도 있다.

젠더 및 섹슈얼리티, 퀴어 연구에서는 자신의 신체적 성별이나 성역할에 대한 불화감 내지는 위화감을 젠더 디스포리아(gender dysphoria)라는 용어로서 설명한다. 만약, 어느 장에 들어온 내가 상징자본의 구성과정에서 느끼는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인 불일치감이나 부조화에 대한 감각이 존재한다고 했을 때, 그리고 그것을 구성하는 지배적 가치들이 ‘미덕’ 혹은 ‘가치/능력’으로서 나에게 구조적인 압박이나 개인적인 박탈감을 지속적으로 부여할 때, 이런 상황을 일종의 ‘디스포리아’라고 불러볼 수 있을까? 개념적 엄밀함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겠으나 편의상 나에게 지속적으로 환기되는 감각을 이렇게 불러볼 것이다.

이번 편에선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려 한다. 그 첫째는 나에게 오래 된 발표공포증에 대한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이미 익히 아는 이야기다. 내게는 어렸을 때부터 무대 및 발표공포증이 있고, 청소년기까지는 누구 앞에서 나의 생각을 말하는 것 자체를 잘 하지 못했다. 이런 내성적인 속성이 언제부터 생겨났는지는 명확하게 판단되지 않는다. 다만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형성된 이런 성격들이 청소년기 또래집단에서의 경험과 대학에 들어와서 초기에 겪었던 공동체 경험들을 통해서 증폭된 것은 명확하다. 내성성은 인간관계나 평가적인 관계에 대한 집착과 질문들로 이어지게 되었고, 언제나 말을 하기 전에 ‘눈치를 보는 버릇’을 부여하게 되었다. 이런 습관들의 근저에는 이런 질문들이 있다. ‘무슨 말을 시작해야 사람들이 편안해 하고 무슨 말을 해야 상대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상대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인정받을까, 어떻게 해야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을까’ 등등.

이때의 경험은 나에게 외상이 되어,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양한 형태로 꿈에서 변주되며, 지금의 연구관심사나 생활에도 지긋지긋하게 밀착된 굴레 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경험들은 나의 생각을 표현하는 언어활동(특히 발화)에 있어서도 ‘얼굴이 빨개지기, 목소리의 떨림, 다리나 손과 같은 신체의 떨림’과 같은 신체적인 증상들을 동반한다. 이런 증상들은 보통 상대방과 나의 관계성이 잘 드러나거나 내가 말하고 있는 공간의 특성이 명확할 때 강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학회나 강의실의 세팅처럼 나를 한 방향으로 바라보는 여러 사람이 있는 공간적 구도는 아주 강력한 긴장을 하게끔 만든다. 긴장을 잘 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하겠지만, 한번 이렇게 신체적인 증상이 생기면 그 증상 때문에 스스로 더욱 긴장하게 되며 머릿속에 백지화가 진행되어 버린다. 머릿속에 할 말이 분명히 남아있는데도 긴장과 압박 때문에 말 자체를 전부 잊어버리고 꺼내지도 못하는 상황은 내 신체의 불화적 측면을 끊임없이 부각하면서 나 스스로를 무한의 자책의 구렁텅이에 빠뜨린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최대한 그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물리적으로는 이런 전략들을 사용하게 된다. 제일 쉬운 것은 ‘약’을 쓰는 것이다. 실제로 발표를 하기 전에 대부분은 약을 먹는데, 심장의 떨림이 좀 잦아들면 확실히 사안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된다(얼마전에 약을 먹었다가 초면인 분께 발표 잘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슬픈 진실을 ‘능력’으로 전유하는 약물의 힘이여). 다음으로, ‘비대면 발표’를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놀랍게도 코로나 시국이 도래한 이후의 온라인 수업에서는 전혀 떨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업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 경위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사실은 청중의 시선이 모니터를 보고 있는 것이지 결코 실제의 나를 향해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깨달음은 좀 충격이었다. 대학원에 돌아와서 그래도 발제를 학기마다 대여섯번 이상 했기 때문에 드디어 공포증의 문제를 나름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에 대면 수업에서 또 다시 예전 같은 떨림이 발생하고, 문장을 이어 말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 막혀들 때의 허탈함과 박탈감이란. 마지막으로는 시작하는 인사부터 끝나는 말까지 모든 대본과 글을 타이핑해서 써 가는 것이다. 이렇게나마 하는 것이 논의를 진행시키고 주어진 시간을 소화할 수 있는 차선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모든 상황을 미리 시뮬레이팅하고, 아무리 텍스트를 최대한 성실하고 꼼꼼하게 이해하고, 아무리 대본을 열심히 써 가도 안 되는 발표라는 실존적 문제를 늘 겪고야 만다. 발표를 하는 순간에는, 예를 들어 세미나나 수업에서 토론하거나 발제할 때와는 달리, 내가 '말한다'는 느낌이 많이 사라진다. 대신 '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느낌이 날 짓누른다. 그러면 아무리 약을 먹어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만다. 동료건 선후배건 위치성들이 다 사라지고 그 자리에서 날 압도하는건 주어진 상황에서 나를 보고 평가하는 타인의 존재 그 자체다. 내가 근본적으로 갖는 긴장들은 단순한 마인드 콘트롤이나 체험을 많이 한다고 해서 쉽게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다시 깨닫는다. 오히려, 나는 긴장의 계기 자체와,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내가 갖는 전략들과 그 의미, 그리고 긴장을 하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서 좀더 깊게 고민하게 되었다.

물리적인 차원을 넘어 좀더 무의식적인, 언어적인 차원에서 내가 이용하는 전략들을 보면, 다음과 같았다. 첫째는 스스로 긴장하게 되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좀 더 비격식적이고 비전문적인 어투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상황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고 싶은 본능적인 방어기제이자, 더 쉬운 언어로 풀어쓰고 좀더 ‘살에 와닿는’ 글쓰기를 하기 위한 장기적인 관점과 연결되는 종류의 것이다. 둘째는 같은 공간에 있는 상대방이나 주제 자체에 미친 듯이 ‘몰입’ 하기다. 집중의 과정이다. 이것은 타인에게 빠르게 가닿을 수 있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 공간에 있는 나 자신을 가장 빨리 덜 의식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긴장하지 않을 수 있는 토론과 공간의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관계성이 다소 구조화된 제도적인 공간보다는 장기적인 공동체 공간에서 더 쉽게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해야 할 것은, 내게 이 모든 전략들은 마련되는 과정에서 하나의 잘못된 언어적 습속과 오랫동안 공존해 왔다는 것이다. 그것은 학술 공간에서 발화할 때 ‘제가 너무 모자라서’ ‘제가 너무 멍청해서’ ‘부족한 질문이지만’과 같이 자기자신을 한없이 비전문적인 영역으로 위치시키는 다소 비하적인 화법이다. 이것은 분명히 겸손과 불안, 낮은 자존감으로부터 출발한 것이지만, 사실은 발화자의 위치의 무게를 떨어뜨림으로써 그 위치로부터 비롯되는 책임감을 최대한 회피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그렇기에 이런 발화는 수행하면 할수록 장기적으로는 발화자의 박탈감을 더 강화하게 된다. 완전한 역효과다. 그러니 자신이 습관적으로 그런 말투를 쓰고 있다면 확실히 벗어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전문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문제는 이런 경험들을 거친 나의 신체적이고 언어적인 습속들이, 학문 장에서의 상징자본으로 여겨지는 ‘전문성’과 같은 미덕에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긴장을 하면 안 되는 이유’의 무의식적 차원 중 하나였다. 연구자로 살다 보니 개인적으로 주변 인물들이 석사에서 박사과정, 졸업자 등으로 이행하면서 생성하는 언어적인 특질의 변화를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상황에 대한 일차적 ‘진단’이나 ‘평가’, 자신이 깊게 빠져 있는 이론가의 시각이나 논지의 재인용 혹은 변용(이게 잘못되면 ‘환원’으로 간다), 경우에 따라 단정적이거나 단호한 말투들, 어느 사안에 특정해서 날카롭거나 무신경한 태도들을 포함한다.

이런 언어적이거나 비언어적인 행동들은 나의 관심분야가 확정되어 있으며 경우에 따라 나는 완결된 분과적 전문인임을 표명하는 제스쳐로 이어질 가능성을 준다. 그리고 자기 안에서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부분이나 모순 혹은 균열들을 감춘다. ‘전문화된 인간’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은 분명히 그런 언어적인 습속들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다. 무엇이 학문 장에서 전문성의 범주를 구성하며, 거기엔 언어와 같이 어떤 보다 미시적인 속성들이 상징자본으로서 부여되는지, 그것은 누구를 배제시키거나 밀어내는지 언제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발표 혹은 말하기는 내가 어떤 종류의 장애 혹은 디스포리아 비슷한 것을 언제나 체험하는 순간이며 자꾸만 소환되는 내 과거와 끊임없이 분투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것은 타인이라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내 불안감이다. 얼마 전 유행했었던 ‘SNL 인턴기자’의 말 떨림이나, 눈치보는 장면 등을 보고 웃지 못했던 이유는 저건 한때의 내 모습도 아니고 대충 준비한 결과도 아닌 영원히 지속되는 내 현실이고, 사회가 조건짓는 ‘미숙함의 표상’에 대한 생애적인 차원의 고민이기 때문이다.

나도 내 얼굴의 열기가 말하는 것들을 안다. 여전히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냐는 나 스스로에 대한 불안과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하고 싶다는 열망, 빨리 대화하고 싶다는 욕망, 기타 등등 여러 가지가 섞여 있을 것이다. 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육체, 내 오랜 트라우마들과 어떻게 협상할 수 있을까. 아마 매번 어떤 공간에서 무슨 발표를 하더라도 종래에는 얼굴이 빨갛게 달겠지만 그게 내가 무너지는 순간은 아니(도록 노력하는 중이)니까 안심해 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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