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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 '연구자'와 '지식 생태계' 개념의 재정의



*이 글은 성신여대 인문도시 사업단 컨퍼런스(2022.6.10.)에서 작성한 토론문의 일부를 재구성한 글입니다.



수년간 함께 연구와 노동을 해왔던 동료이자 친구와 며칠 전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는 네가 직업으로서의 연구를 한다고 생각해? 글쎄, ‘업’(노동)으로서는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직 학생이라 그런지 직업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어. 사실 나 스스로를 연구자라고 부르는 것도 얼마 전까지는 계속 고민됐어. 그래? 넌 네가 배운 지식을 활용해서 연구용역과 노동을 하고 있는데, 왜 스스로를 연구자라고 부르길 주저했을까? 이 대화는 왜 어느 순간부터 내가 ‘연구자’들의 삶에 대해 계속해서 말하려고 하고 쓰고 있었는지(여기 써온 칼럼의 궤적들만 봐도 그렇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깨닫게 했다. 나에게 있어 ‘연구자’라는 위치는 직업을 넘어선 정체화의 영역에 있었던 것이고, 학술 장에서 나라는 사람의 중층적인 위치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연구자이자 지식노동자로서의 자기 정체화가 매우 중요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나를 포함하여, 간혹 수업 등에서 스스로 ‘연구자’라고 불릴 때 굉장히 당황스러워하는 또래 동료들을 상당히 많이 보아왔다. 이는 아마 연구를 수행하기에 충분히 훈련이 되어 있지 못하다는 자기 의식과 함께, 아직 ‘학위'를 따지 못했고 주로 정규 학술지 게재로 대표되는 ‘연구성과'를 충족하지 못했다는 자신들의 위치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법률적 근거에 의하면 나는 아직 ‘연구자’가 아니다. 학술진흥법 제2조 5항에 규정되어 있는 ‘연구자’의 범위는 박사학위를 소지한 사람, 겸임교원, 대학·부설연구소·연구기관에 소속된 연구원 등으로 한정되어 있다. 즉 학계 사회의 지배적인 시스템은 ‘연구자'라는 위치 및 그에 부여되는 학계의 공식적 성원권을 박사학위 소지자 이상의 공신력 있는 실적을 낸 연구자로 제한하고 있으며, 우리 모두 또한 (누군가가 너는 연구자라고 제대로 이야기해주기 전까지는) 자신을 제도의 누락된 공백 속에 욱여넣는 절차에 너무나 쉽게 동의해 왔다. 내가 수행한 연구노동과 그 결과에 대해서, ‘난 아직 학위를 딴 전문 연구자가 아니고’ ‘이것은 논문실적도 아니니까’ ‘이것은 나의 연구성과가 아니라 알바 같은 일이야, 아니면 연구에 대한 좋은 경험일 뿐이야’라는 모종의 검열과정이 있었다. 내가 지금도 매일매일 수행하는 이런 노동들은 (직장인들의 ‘직업노동’에 비교하면) ‘일’조차 아닐 수 있다는 명제에 대한 암묵적 동의가 있었다. 학생신분의 연구자들이 스스로 노동이나 연구의 속성을 후려치는 검열행위가 제도에 의해서 내면화된 부분이 분명히 있고, 그러한 검열의 강도는 학위를 소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노동을 수행하는 연구자들일수록 더더욱 자연스러워지고 강력해진다.


이러한 ‘연구자’ 개념의 협소한 협의는 지원사업의 자격요건 등과 같은 제도적인 차원에서만 끝나지도 않는 듯하다. 언제나 한 연구자의 공과를 따질 때 우리는 그의 ‘연구성과'를 보고 판단 가능함을 전제하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구자는 연구결과물로 말해야 한다'고 말하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명제는 지식생태계와 그것을 구성하는 노동들의 성격, 연구성과의 기준 자체를 문제삼고 규명하지 않는 한 절반만 유효한 주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식생태계를 순환시키는 ‘지식 노동'은 학위소지 이전 단계부터 학위과정 내내 계속해서 발생하게 되기 때문이다.


각종 연구용역들을 포함해 학회든 포럼이든 학교 바깥에서 할 수 있는 세미나와 토론공간이든, 광의의 지식/연구/학술 생태계를 돌리고 순환시키고 그게 그 자리에 남아있도록 만드는 노동은 ‘(학술적/공식적) 연구성과'라는 얄팍한 용어가 포함하는 영역을 아득히 초과한다. 대학에서 연구과제를 수주해서 보조하든 아니면 학교 바깥에서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 학회를 만들어 나가든, 거기엔 ‘적은 예산’으로 ‘많은 인력’들이 필요하다. 갓 학위를 따고 학술 장의 공식 행위자로 간주되며 (그래서 이젠 네가 좀 일을 맡아서 할 것을 요청받는) ‘학위취득 신진 연구자'뿐 아니라 훨씬 더 많은 과정생들이, 또는 아직 학위과정에 들어오지 못했거나 어딘가에서는 ‘독립연구자' 혹은 ‘이행기'라 설명할 수 있는 많은 단계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그 생태계의 속성을 유지하거나 새롭게 규정하는 노동들에 이미 복무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노동의 결과에 대해서 연구자가 수행한 정당한 연구활동의 결과물은커녕 공식적 노동의 지위조차 제대로 부여받지 못했던 것이 지난 세계의 역사가 아닌가.


그렇다면 그 ‘지식노동’들이 과연 연구자의 ‘연구활동’ 혹은 ‘연구성과’가 아니라 할 수 있는지 되묻는다. 아니라면 왜? 연구자의 순수하게 독자적인(?) 연구문제와 방법론으로 단독에 의해 수행되지 않아서일까? 그렇다면 우리가 선행연구들을 자원 삼아 쓰는 논문은 아주 순수하게 단독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연구라 할 수 있는걸까? 나는 연구자 복지나 연구안전망 문제를 둘러싼 어떤 ‘시차’들, 즉 이런 문제들이 크게 공론화되지 못하는 복합적인 원인 중 하나 역시 여기에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지식노동들은 종종 노동이나 연구의 범주에조차 속하지 않으며, 또 그 노동을 수행하는 어떤 주체들(특히 학위 미소지자)은 공식적인 연구자로 인정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너희는 (‘일반적인 노동’과 달리) 연구가 좋아서 선택한 일이니까’라는 논리로 생계(노동)와 연구(지식)를 분리하고, 돈 없이 대학원에서 공부하려는 것을 지적 사치 혹은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며, 지식생태계 내 노동의 속성을 지워내는 이 ‘시차’는 학술 장 바깥의 시선뿐 아니라, 동시에 학술 장에서 제도 안쪽으로 대표되는 대학 공간에서도 발생하고 있다. 학교에서는 많은 경우 ‘노동을 수행하는 연구자’, 연구용역을 하며 학비를 벌고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과정생의 위치에 대한 논의들이 지워져 있다. 학교에서 (심지어 교수-학생 사이의 착취관계가 비교적 클린한 곳에서조차) ‘지식’ 자체의 전달은 이루어질지언정, 그 지식 자체의 성격이나 지식의 순환에 담보되는 노동의 논리들에 대해서 토론할 기회는 잘 주어지지 않는다. (누가 유명한 연구자이며, 누구의 어떤 글이 탁월하고 어떤 글이 구린지, 해외의 누구의 논의가 핫하고 해외를 간다면 어딜 꼭 가봐야 하는지는 수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논의되는데도 말이다!) 연구자로 살아가며 겪게 되는 노동 수행과 생계 유지에 대한 노하우는, 혹은 연구자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장기 전망들은, 정교원 연구자의 프로젝트 제안을 제외한다면 일부 학생들 사이에서 ‘암묵지’로 작동하는 수준에 그친다.


이런 상황에서, 학술 장 내 제도의 사각지대에 있었던 사람들이 그동안 가장 많이 할 수 있었던 실천의 형식은 ‘자기 위치’에 대해 성찰하고 생각하고 말하기였다고 생각한다. 지난 수년간 떠올려보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학술 장 내에서의 자신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그것을 글로 만드는 작업들을 해왔다. 이러한 자기-말하기들이 좀더 공적인 차원에서 ‘연구자 권리선언’이나 ‘커먼즈’의 구성과 같은 움직임으로 집단화되어 시도된 지는 정말 얼마 되지 않는다. 우려스럽게 생각하는 점은 나 자신을 포함하여 그 많은 사람들이 점차 개별적인 자기 말하기, 공통적인 것으로 올라서지 못하고 특정한 형태로 소비되어 버리는 말하기의 과정에 점점 소진되어갈 위험에 처한다는 것이다. 학술 장 내의 어떤 시차(시간의 차이時差이지만 또 시각의 차이視差이기도 할)는 여전히 그런 방식의 자기 말하기를 공동의 문제로 넘어가지 못하게 한다. 혹은 그런 자기 정체화나 글쓰기의 문제를 ‘가난 서사의 전시’로 치부하거나, ‘정체성 정치의 한계’라는 말들로 지워내거나, ‘일단 내가 겪을 수 없는 타인의 경험이니 무조건 존중하고 말을 삼가겠음’이라는 식으로 없애버린다. 모두가 하루하루 생계노동을 하고 있으면서 우리의 노동자-됨에 대해 아무 이야기를 하지 않고, 실적으로서의 연구자 상만이 보편적이고 바람직한 상으로 남는다. 거기서 외로움도 고립도 강해진다.


결국 자기 이야기를 하는 연구자들이 소진되어 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학술 장에서의 ‘시차’에 대한 질문을 여러 방식으로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 시차에 대한 접근은 제도, 권리선언, 학술연구의 영역이 모두 건드릴 수 있는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년 11월, 연구자 권리증진과 차별철폐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에 의해 발표된 ‘연구자 권리선언’은 제 1조에서 ‘연구자’의 정의를 종래의 ‘연구기관 소속 학위소지자’에서 ‘연구라는 노동을 수행함으로써 지식을 생산하는 사람’으로 확장했다. 이렇게 확장된 정의는 그 안에 그간 비가시화되어 있던 여러 형태의 다른 연구자들을 ‘연구자’로서 품을 수 있게 했고, ‘아직 과정생이지만 노동을 하는 우리’도 비로소 ‘권리를 추구할 수 있는 존재’임을 확인케 했다. 이렇게 ‘연구자’나 ‘지식 생태계’의 정의와 형태를 점차 확장함으로써 누락된 영역들을 다시 집어넣는 것, 그리고 학술연구의 영역에서는 이러한 시차의 역사들을 꼼꼼하게 분석함으로써 그동안 왜 누락되어 있었는지를 밝히는 것, 이런 실천들이 연구자 재생산 문제를 공론화할 수 있는 여러 방법들 중 하나가 아닐는지 고민해 본다.


새 사업을 시작하려고 이력서를 쓰니 최근 3년간의 연구실적을 적는 공간이 있었다. 아직 연구재단에 등재된 정규학술지에 게재한 논문이 없으니 쓸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막상 모아보니 각종 간사활동과 연구과제들, 올해 맡게 된 위원직부터 시작해서 이것저것 되었다. 그러면서 3년간 나 역시 지식생태계를 돌리기 위한 적지 않은 활동을 해왔음이 비로소 ‘느껴졌다’. 나 그 사이에 살아가면서 정말 많은 일과 연구들을 했구나. 그러면서도 이것들의 존재를 무시하고, 성과로서 인정하지 않고 있었구나. 나는 그 활동들을 연구와 분리하여 ‘일’의 세계로 밀어놓으면서, ‘연구자’로서 나 스스로를 은연중에 무시하고 검열해 오고 있었구나. 사실은 동료들과 함께 그 세계를 유지시키고 만드는 노동들을 해오고 있었는데도. 뒤늦게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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