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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우] 은유로서의 '코로나19'

최종 수정일: 2022년 2월 18일




“에-ㅅ취!”


버스의 적막감을 깬 것은 외마디 재채기 소리였다. 심드렁하게 앉아있던 이들의 시선이 모두 그 쪽으로 쏠렸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재채기야 누구나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머지않아 이들의 시선을 찌푸림으로 바꾸는 소리가 들렸다.


“크흠.. 콜록! 큼! 큼!”


가래가 뒤섞인 밭은기침 소리. 그 순간 마치 짠 것 마냥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승객들 사이에서 불만 섞인 탄식이 새어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날은 해당 버스가 지나가는 노선인 이문-회기동 일대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왔던 날이었다. 각종 언론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확진자를 속도 경쟁 하듯 보도하고 있었고, 질병으로 인한 사망 소식도 간간히 보도되는 와중에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는 커져만 가는 상황이었다. 한편, 마스크를 비롯한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도구들은 품귀현상을 빚고 있었다. 게다가 다수의 기업과 대학들은 재택근무를 도입하거나 개강을 연기하는 등 모든 사회가 ‘코로나19’라는 질병에 신경이 곤두서있었기에 이와 같은 반응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위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요즘 시절이 하 수상하다. 작년 말부터 시작된 ‘코로나19’라는 호흡기 질환은 어느덧 ‘대유행(pandemic)’이라는 수식을 달고 언급되기 시작했다. 사실 21세기 들어서 우리 사회가 이와 같은 전염병을 처음 겪어보는 것은 아니다. 지난 2009년 한국 사회를 강타한 신종플루는 국내에서만 약 75만 명의 감염자를 발생시킨 질병이었다. 당시 내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신종플루를 앓았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지금 유행하는 ‘코로나19’의 경우, 아직 진행 중이지만 질병의 전염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가 10여 년 전의 신종플루보다 훨씬 큰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차이는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물론 10년 전의 사건에 비해,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고 있는 현상이 피부에 더욱 밀착한 채로 감각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큰 공포를 느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10년 전, 신종플루는 ‘타미플루’라는 치료제가 존재했던 반면, ‘코로나19’의 경우 새롭게 등장한 변종 바이러스이기에 아직 백신이 존재하지 않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큰 공포감을 자아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코로나19’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감 자극에 결정적인 역할은 한 것은, 앞서 언급했던 이유들보다 ‘코로나19’에 따라붙는 이미지들. 즉 ‘코로나19’라는 질병을 지시하는 은유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 2019년 말, 중국의 우한 지역에서 사람들이 갑자기 쓰러지는 동영상이 SNS를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사람들이 쓰러진 원인으로 ‘폐렴’이 지목되었고, 이를 유발하는 것은 새롭게 등장한 변종 바이러스라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우한 폐렴’으로 명명된 이 질병에는 갑자기 쓰러지는 사람, 아수라장이 된 병원 풍경 등 자극적인 이미지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이후, 이 질병의 발원지로 중국 우한 지역의 한 비위생적인 시장이 지목되었고, 지금은 ‘코로나19’로 명명된 이 질병에는 각종 ‘썰’들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썰’들은 생쥐를 산채로 먹는 영상, 박쥐를 먹는 영상과 같은 자극적인 이미지와 함께 제시되며 이 질병의 메타포를 구성해나갔다. 이윽고 이와 같은 이미지들은 본디 질병에 따라붙는 ‘더러움’이라는 의미를 강화시켰고, 도시 곳곳에서 쓰러지는 사람들로 재현되는 자극적인 이미지는 ‘전염’이라는 의미가 결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련의 이미지들이 ‘코로나19’에 대한 사람들의 혐오와 공포감을 증폭시켰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지점은 혐오와 두려움의 대상이 ‘코로나19’라는 질병이 아닌, 특정한 인간 주체와 개인으로 환원되고 있다는 것이다. 초기 ‘코로나19’와 관련한 혐오와 두려움의 대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아닌, 우리의 가시성에 포섭되는 ‘중국인’과 ‘조선족’이라는 ‘인간’이었다. 당시 중국인의 입국금지 청원에 수십만의 사람들이 동의했던 현상, 그리고 SNS 등지에서 중국인 밀집 지역에 대한 정보 공유 등은 ‘코로나19’가 질병이 아닌 사람의 얼굴을 하고 우리에게 다가왔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와 같은 사람들의 반응은 질병의 진원지와 결부되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자연스러운 인식은 과연 자연스러운 것일까? 어쩌면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이 이미 지니고 있는 억견과 오인으로 구성된 ‘자연화’라는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다만 확실한 것은 ‘코로나19’를 둘러싼 현상들은 ‘코로나19’가 온전히 질병 그 자체로 존재하고 인식되는 것이 아닌, 특정한 은유와 결합된 담론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코로나19’의 전염이 한 차례 수그러들었다가, 다시금 확산된 작금의 현상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지난 2월 말, ‘코로나 정국’이라는 예외상태가 종결되는 것처럼 보이는 시점에서 갑작스레 확진자들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후 질병의 급격한 확산에 신천지라는 이단 종교 단체가 관련되어 있음을 알리는 정보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국내에서는 ‘코로나19’에는 우한이라는 중국의 지명이 아닌, 추가 확진자들의 지역, 종교 등이 따라붙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 속에서 ‘코로나19’는 온전히 질병으로, 바이러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신천지’, ‘대구’, ‘과천’ 등 다양한 외피를 둘러쓴 채, 인식되고 언어화되고 있다.


사실 질병은, 그것도 전염성이 강한 ‘코로나19’와 같은 질병은 재난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재난 하에 놓여있는 지금 여기의 현실을 ‘코로나 정국’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건 앞에 놓인 개인들은 무력하다. 무력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무력감을 자아내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가시성의 영역에 넣기 위해 갖은 은유와 결합시킨다. 이미지화 시킨다. 가시화 시킨다. 그런데 그 이미지가 무섭다. 어쩌면 그 이미지의 한 가운데에 내가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공포스럽다. 그러기에 ‘코로나19’라는 질병으로 은유되는 사람들을 ‘확진자’로 구분짓고, 그들을 격리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비단 지금 여기의 한국 사회에서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바다 건너, 어떠한 나라에서는 한국인을 비롯한 동양인을 격리시키고, 그들을 공간에서 몰아내고, 때로는 욕을 하고 때리기까지 한다.


이처럼 ‘코로나 정국’이라는 예외상태는 코로나19’라는 질병에 걸린 이들을 ‘확진자’라는 이름 하에 납작하게 구분짓고, 그들을 열심히 몰아내고 배제하는 것인 듯 하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질병에 걸린 사람은 사람이 아닌, ‘질병 그 자체’로 환원되거나, ‘질병의 의미를 가진 숫자’로 재현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질병을 퍼트릴 수 있는 암묵적 병원체로 은유되고 인식된다. 지금 시점에 대입해보자면, ‘코로나19’ 확진자는 더이상 특정한 개인이 아닌,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 자체, 아니면 사회를 병들게 한 죄인처럼 여겨진다. 따라서 ‘코로나 정국’이라는 예외상태 속에서 ‘코로나19’라는 질병으로 은유되는 이들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와 혐오는 정당화되곤 한다.


물론 우리는 은유없이 사고할 수 없다. 특히 질병과 같이 증상으로 그 존재를 가늠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은 더욱 은유를 통해 그 인식과 이해의 폭을 넓힐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모든 은유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때에 따라서 우리는 피해야할 은유가 있으며, 그 은유를 통한 사고와 언어화에 있어서 판단중지를 외쳐야 할 때도 있다. 특히 지금과 같이 무분별하게 질병을 가진 특정 개인에 대한 혐오와 배제, 구분이 수반되는 상황에서는 더욱 질병에 따라 붙는 은유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봐야하지 않을까?


수전 손택은 “이 사회에는 악과 동일시 될 수 있고 그 ‘희생자들’에게 비난을 퍼부을 수 있는 질병. 그 어떤 질병이라도 이보다 더 사람들을 강박증에 빠뜨릴 수 있는 질병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고 언급한 바 있다. 손택의 언설이 환기하는 의미가 지금 여기의 현실과 겹쳐지며, 시리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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