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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기] 인터뷰로 쓴 논문에 대한 어떤 불만



최근 ‘청년’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이들을 인터뷰하여 작성한 논문들을 연이어 읽었다. 대체로 여러 연구들은 “이것과 저것이 똑같이 KCI 등재지 1편 실적으로 ‘수량화’된다는 사실”이 매우 불공정하게 느껴질만큼 그 질의 편차가 크다. 어떤 글은 인터뷰 녹취록을 대단히 저널리스틱한 방식으로 대강 배치하여 나열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드는 반면, 또 어떤 글은 많은 이론적 자원과 다른 참고문헌(비교의 준거)을 동원하여 세밀한 분석을 제공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한데, 대부분의 논문에서 느껴지는 불만족스러운 차원이 있었다. 핵심은 인터뷰 참여자들의 발화를 매우 투명하고 객관적이며 신뢰성 있는 종류의 자료(data)로 취급한다는 데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저희 세대는 집단보다는 개인을 더 중시해요”라는 연구참여자의 발언을 근거로 청년세대의 개인주의를 곧바로 도출해낸다. “취업을 위해 학점관리와 영어성적뿐만 아니라 대외활동을 하려 노력한다”는 발화는 곧바로 경쟁과 스펙에 매몰된 청년의 현실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이상의 사례들이 청년에 대한 기존의 주류적 고정관념을 강화시키는 연구결과로 이어진다면,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기존 청년담론이 노정하는 일정한 편견들을 청년 당사자의 발화를 통해 해체하려 하는 기획이다. 예컨대 연구참여자의 인터뷰 내용을 근거로 청년세대가 결코 능력주의적 공정에 치우쳐져 있지 않음을 강조하는 식이다. 이런 류의 연구에서 인터뷰 자료는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되지만, 연구참여자의 발화 그 자체를 무언가 진실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는 시각은 변하지 않는다.


인터뷰 자료를 사용하는 이러한 방식에는 몇 가지의 이분법이 흐르고 있다. 첫째, 이들은 ‘거짓(허위) 담론’과 ‘진짜(진실) 담론’을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 대체로 ‘거짓 담론’은 당사자가 아닌 타인이 외부규정하였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으로, 역으로 ‘진짜 담론’은 당사자가 자기규정할 때만 가능한 것으로 여긴다. 즉, 당사자 담론으로 명명된 해당 연구의 연구참여자의 발화 자료에 특권적인 위치를 부여한다. (당사자 개념의 난감함에 관해 내가 적었던 글은 링크를 참조) 셋째, 대체로 청년을 다루는 대다수의 논의는 청년에 대한 재현(representation)인 반면, 청년 당사자의 발화는 무매개적으로 청년 그 자체를 제시(presentation)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같은 이분법은 지양되어야 한다. 해당 연구자들의 인터뷰 참여자들, 즉 청년 당사자들 또한 언어공동체의 일원이기에 그들의 발화는 우리 사회 믿음의 체계, 즉 담론적인 것에 의해 이미 굴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터뷰 연구의 발화자들은 대체로 우리 사회의 주요한 사유의 도식을 이미 공유한다. “저희 세대는 집단보다는 개인을 더 중시해요” 라는 발화가 드러내는 것은, 청년세대의 개인주의 성향 그 자체라기보다는, 청년세대를 개인주의 성향과 연관지어 이해하는 담론의 영향력이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민중적’이라고 하셨나요?”라는 글에서 피지배계급의 자기규정 또한 지배계급과 동일한 논리를 내장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다시 개인주의 성향으로 돌아와 논의하자면, 집단(공동체)주의-개인주의의 틀과 관련하여 청년을 이해하는 대안적 담론을 청년들이 창출하거나 혹은 알게 되지 못하는 한, 스스로 혹은 ‘자기 세대’의 행위를 청년이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개인주의화’로 귀결된다. 아무리 성찰에 성찰을 거듭하더라도 이 담론 체계 바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한 생각은 돌고 돈다. (그러니까 어떠한 발화를 충분히 메타화시키지 못하는 해석/분석을 ‘성찰적’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하여 30년 전의 청년들도, 지금의 청년들도, 대체로 이 틀을 가지고 스스로의 세대를 이해하고 발화해왔다.


청년의 발화 그 자체를 연구결과로 삼는 인터뷰 연구의 경향은 다음과 같은 문제로도 이어진다. 발화 자료가 청년에 대해서 의미화하는 바를 곧바로 연구참여자의 개인적인 혹은 청년세대의 세대적인 성향으로 연결지어버리고 분석을 거기에서 얕게 끝내는 것이다. 이는 그러한 발화 내지는 발화가 드러내는 성향의 발생조건(예컨대, 사회공간 내에서 연구참여자가 갖는 위치성이나 발화의 내용에 틈입되어 있는 상호텍스트성, 사회공간의 구조 및 장의 굴절 효과 등)을 괄호 속에 넣어버리는 태도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모든 연구에서 인터뷰 참여자의 발화를 심층으로 끌고 들어가서 분석하기란 매우 어렵고 지난한 작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인터뷰 자료를 언어 차원에서 한 번,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사회구조와 담론의 차원에서 두 번 분석하지 않으면, 질적 연구의 분석이라는 게 사실상 저널리스트들이 좀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여하여 생산한 기사와 어떤 점에서 변별되는지를 스스로 증명하기 어렵게 된다. (행정노동, 강의노동 등으로도 연구자들이 많은 시간을 뺐기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인터뷰의 건수나 사례 모으기 면에서는 저널리스트들의 작업이 좀 더 우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될 때도 종종 있다.)


사실 나 또한 조만간 ‘청년’ 연구참여자들을 만나 심층인터뷰를 진행할 참이다. 어렵겠지만 내가 다른 논문들을 읽으면서 느끼는 아쉬움을 반복하지 않아야 하겠다는 다짐으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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