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칼럼은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최근 나의 삶에 매우 충격을 준 영화가 있다. 바로 양자경 주연의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이하 에에올)>을 본 것이다. 마블 유니버스의 이어 '멀티버스'라는 최신의 소재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자칫 할리우드 영화처럼 상업적으로 비춰질 수 있는 영화를 감독은 철학적으로 가족, 인종, 정체성 등 다소 무거운 주제를 영화에 자연스레 녹여내며 명작을 만들어냈다. 자신들의 전작에서 보여준 B급 감성을 이번 영화에서도 적절히 녹여낸 다니엘 콴과 다니엘 쉐이너트(이하 다니엘즈) 감독의 연출은 가벼움과 무거움이 공존하는 '단짠'이며 '겉바속촉'한 맛난(?) 영화를 만들어내는 데 이바지했다. 유독 이 영화가 내게 준 감동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다가, 29살 막바지를 보내고 있는 서우빈으로서의 감상평을 영화 속 인물들에게 투영해 남겨보도록 한다.
영화 속에서 다양한 삶을 살고 있는 에블린은 메인 에피소드를 끌고 나가지만 실상 그는 자신에게게 주어진 삶 속에서 최악의 선택을 했을 때 벌어지게 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한 에블린의 삶을 두고 알파-웨이몬드는 "그 모든 거절과 그 모든 실망이 당신을 여기로 이끌었어, 이 순간으로"라고 말을 하는데, 최악의 선택들로 이루어진 삶이기에 가장 가능성이 많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위로가 되면서도 씁쓸한 여운을 남겼다. 내 삶의 어떠한 선택이 최선과 최악임을 누가 정할 수 있는 것일까. 멀티버스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해서 내 모든 가능성의 삶들을 망라해본다면 특정한 선택들은 '최악'이라고 평가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대학원 진학을 통해 공부를 선택한 것은 내 인생에 있어서 어떤 선택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까.
실제로 대학원을 선택한다는 것(특히나 인문/사회 대학원생이 된다는 것)은 일반적인 생애주기를 기획하는 사람들에게 조금 '특이한' 선택이거나 '특권'처럼 비춰지는 듯하다. 전자는 인문대 석사라는 학위는 취업에 도움을 주지도 않고, 경력을 인정받기도 힘든데도 기꺼이 선택했다는 의미로서 '특이한' 것이고, 후자는 '당장 먹고 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으니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씨름할 수 있는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특권'의 삶처럼 비춰지는 것이다. 물론 대학원 내에는 정말 다양한 삶들이 존재하고 앞선 평가들이 맞을수도 혹은 그 이상의 신념을 위해 공부를 택한 삶들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고 싶은 건 대학원 진학에 대한 이러한 남들의 평가보다도 나는 왜 '공부'를 더 선택했을까 하는 고민이었다.
공부를 선택하지 않은 삶을 상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아나운서를 여전히 그리워하기도 하고, 직장에서 하나둘 경력을 쌓으며 이직하는 친구들이 생겨날 때 제자리걸음하고 있는 내 자신이 두렵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대답은 간단했다. 정말로 공부가 즐겁고 더 하고 싶었기 때문에 대학원에 진학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정말 즐겁고 행복하냐 묻는다면 잠시 대답을 머뭇거리게 된다. 이 정적은 비단 직장인이 루틴화된 삶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권태감과 비교해볼수도 있겠고, 대학원생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당연한 성장통에서 오는 것일수도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굳이 몰라도 되는 걸 너무 아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었다.
학부에서 사회학을 배우고 와서 그런것도 있겠지만 공부를 통해 넓어지는 시각은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인식을 넓혀주었으나 그만큼 답 없고 부질없는 사회를 보여주기도 했다. <에에올>에서 에블린의 딸인 '조이'도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우연한 기회로 자신의 모든 선택이 이끄는 삶을 경험한 조이는 모든 가능성의 삶들을 처음엔 재미있어 하다가 나중엔 결국 모든 의미를 잃어버리는 허무주의에 빠지고 만다. 나또한 공부를 할때마다 넓어지는 시각에 흥미를 느끼지만 동시에 거대한 사회구조 속에서 나는 아무런 힘을 가질 수 없는 미약한 개인임을 느낄 때 공허한 감정이 밀려오며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이러한 허무주의에 빠진 조이는 자신을 이해해줄 사람을 찾아 여러 멀티버스를 헤맨다. 그리고 현재의 나도 굳이 '공부'를 택한 삶에 대해 이해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 삶을 이해해줄 사람을 찾아 헤매던(아니, 아직도 헤매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공부'라는 선택이 과연 옳았는가 아직도 의문이 든다.
영화는 이러한 허무주의에 대해 '사랑'이라는 (어쩌면 조금은 뻔한) 답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 재현이 주인공을 통해서가 아니라 조력자인 현재 세계의 웨이몬드를 통해 이뤄진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냉철한 판단력과 강인한 신체를 갖고 있는 '알파-웨이몬드'와 다르게 현실 세계의 웨이몬드는 장난을 좋아하고, 어딘가 여리며, 큰 욕심없이 삶을 살아내고 있는듯하다. 정신없는 싸움이 벌어지는 영화 속에서 현실세계 웨이몬드의 이러한 '순수함'은 다소 '쓸모 없다'고 느껴지는데 감독은 그러한 순수함 속에서 쓸모를 찾아내 그것을 '다정함'으로 제시한다. 특히나 압권이었던 것은 마지막 전투 장면이었는데, 에블린이 웨이몬드의 이러한 '순수함'을 무기로 많은 적들과 싸워나갈 때 그들을 무력으로 제압하지 않고 그들의 순수한 욕망을 이뤄줌으로써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 때, 바로 이것이 내가 공부를 선택한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나는 어딘가 내가 바꿀 수 없는 세상일지라도 그 세상을 조금 더 다정하게 보기 위해서, 조금 더 나은 세상을 꿈꾸기 위해서 공부를 선택한 것이었다.
학위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석박사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이미 썼거나 앞으로 쓸 논문 주제들에 대해 스스로가 '다정함'을 갖고 있다고 느낀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도, 세상의 부조리함을 고발하기도 하면서 결국 그들은 다정한 사회를 꿈꾸며 나아간다고 느꼈다. 이런 거창한 신념으로 돈을 벌어먹고 살 수 있을지는 여전히 회의적이지만, 적어도 '공부'를 선택했다는 것의 쓸모는 이러한 연구자들의 다정한 시선만으로도 충족되는 것은 아닐까. 다양한 순간, 공간 속에서 다정하길 바라는 그 마음들만으로 그래도 우리의 삶들은 조금 더 다정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대학원생들의 선택과 쓸모에 대해 즉각적인 대답만을 요구하는 사회에 나는 웨이몬드의 말을 빌려 답하고 싶다.
"내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우리 모두 다정해야 한다는 거야. 다정함을 보여줘. 특히 우리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때 말이야"
오늘도 대학원에서는 다양한 다정함들이 목격된다. 올 한해 이러한 따뜻한 마음들로 위로를 받았으니 내년엔 나도 조금 더 다정한 대학원생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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