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과 작년,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에서 진행했었던 공간 세미나에서 나는 항상 세미나 구성원들에게 "당신이 외딴 곳에 떨어졌을 때, 그곳이 도시인지 시골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던지곤 했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이러한 질문은 모든 공간/장소를 도시와 시골이라는 두 개의 항으로 분리해서 생각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질문을 던졌던 본질적인 이유는 사람들이 감각하는 공간의 질서가 어떻게 구성되고, 그리고 어떻게 언어화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함이었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은 감각하고 있을 것이다. 모든 공간은 그 공간만의 질서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어떤 이들은 추상화된 질서를 구체화시켜 특정한 상징으로 그 질서를 응결시켜 공간을 장소로 만들고자 한다. 어떠한 이들은 철저하게 방관자적인 입장에서 그러한 공간과 장소의 질서를 감각하는 것에 그치곤 한다. 또한 어떠한 사람은 그러한 장소에 편입되지 못한 채 비가시화 되거나, 공간에서 배제되곤 한다. 이처럼 언어를 경유하든, 직접적인 물성에 대한 것이든, 우리는 모두 공간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에 대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공간에 대한 감각은 해당 공간에 대한 각자의 지각과 체험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우리는 다양한 삶의 궤적 속에서 형성된 공간 경험을 통해,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라는 물리적이지만 때로는 상징적인 대상을 구축한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세계’는 모두에게 일률적인 형태로 다가오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세계 내 특정한 공간에 자신의 정체성이 반영된 ‘장소’가 주어지는 반면, 어떤 이들에게는 끊임없이 축출의 경험만을 안겨주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 ‘세계 내 공간에 속한다’는 의미가 다층적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의미한다.
가령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과 관계 맺는 과정(공간 경험)에서 따라오는 감각에 대해 생각해보자. 나는 분명 서울 어딘가에서 나름 정주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내가 서울이라는 공간 일부를 장소로 만들며 거주한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내가 거주하는 공간의 지계는 서울이라는 행정구역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지계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듯이 이는 지리적-행정적인 층위에 국한되는 일일 것이다. 오히려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에 대해 주민등록증에 적힌 한 줄의 주소를 제외하면, 이 공간을 장소로 감각케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이 있을까?
돌이켜보건대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에서 나는 소속됨보다 배제와 축출을 더욱 자주 감각했던 것 같다.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았던 셋방, 임대 계약을 갱신할 때의 거부당할 것에 대한 긴장감은 내가 서울에서 거주했던 공간들로 하여금 한시성의 감각, 내몰림의 감각만을 안겨줬었고, 그렇기에 나는 그러한 공간들을 나의 장소로 만들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그리고 이후에 내가 정주하고 정주하게 될 공간들에 대해 생각해봐도 그에 대한 공간들 역시 항상 한시적일 것이라는, 혹은 내가 임대한 공간에 수맥처럼 흐르는 질서에 내 신체를 스스로 규율하게 될 것이라는, 그래서 나에게 장소감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만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감각들로 인해 나는 서울이라는 물리적 건조 환경에 둘러쌓여 있지만, 이따금씩 내 공간 경험이 내가 인식하는 '세계'라는 상징적인 대상에서 축출되고 있음을 느끼곤 한다. 이에 대해 혹자는 '장소없음'의 경험, '비장소'의 일반화라 언급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어떠한 이는 이러한 '장소없음'을 개탄하며, 추상적이고 근대적인 정언명령적 공간에서 탈피하기 위한 도시 공간의 심미화를 꾀하곤 한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이 역시도 공허하다. 장소의 복귀를 추구하는 많은 도시 계획들은 너무나도 쉽게 금융자본의 개입 하에, 소유에 입각한 지대를 추구하는 금리생활자의 편익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근대적 도시의 공간적 배치는 교통, 안전을 비롯한 각종 인프라 제공을 위해 구성되어온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푸코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러한 근대 자유주의국가에서의 도시 공간은 집합적인 '생/삶'으로서의 '인구'에 대한 상상으로 등치되어 온 측면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이렇게 인식되는 공간은 그곳에 살아가는 생명들을 파악하고, 배치하고, 규율하는 여러 방식들을 동원하기 위한 질료로서 사용되곤 했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공간 속에 살아가는 이들, 그리고 그들의 삶은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의 배치 속 어디에 위치하고 있을까?
앞서 짤막하게 언급했던 개인적인 사례는 소유에 입각한 거주 감각의 차등화, 그리고 그를 통한 권리의 제약이라는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의 다면적인 질서 중 단면에 불과하다. 사실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에 편재한 다면적인 질서들은 지금도 많은 도시 내 주체들을 끊임없이 솎아내고 축출하고 있다. 철거민과, 노숙인, 그리고 노점상과 같은 존재를 ‘공적 공간’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들을 배제하는 장면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도시 공간의 풍경처럼 자리매김하고 있다.
다른 한편, 도시 내 차이와 그에 입각한 다양한 몸들을 비가시화하는 질서 또한 존재한다. 앞에서 언급한 도시 내 다양한 주체들은 항상 무성적인 존재로 인식되곤 한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도시 공간 내에서 소외받고 축출되는 존재들에 대한 권리를 옹호하는 이들 역시 이러한 사람들을 철거민, 노숙인, 노점상, 세입자와 같은 언어로 재현할 뿐, 그들(때로는 이러한 언어로 표상되지 않는) 사이에 존재하는 ‘성애화된 신체’들에 대한 고려 역시 미미한 편이었다. 일례로 며칠 전, 서울 시장 후보로 출마하기 위한 한 정치인의 ‘퀴어 특구’에 대한 발언에서 지금 여기의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을 구성하는 질서의 한 축으로 정상 가족과 규범적인 이성애 관계라는 규율을 통해 구성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공간의 질서, 특히 도시라는 공간의 다기한, 그리고 다면적인 질서가 어떻게 감각되는지에 대한 문제는 공간 내 편재한 숱한 몸들, 그리고 그러한 몸들이 만들어내는 삶의 흔적들에 대한 감각과 밀접히 연결된다. 지금도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에는 우리가 감각하는, 그리고 감각하지 못하는 다양한 몸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러한 몸들의 존재를 어떻게 감각해야하며, 그리고 어떠한 신체도 배제되지 않는 질서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에게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의 질서를 경험하며 구축된 ‘세계’는 어떠한 모습이며 우리에게 그러한 ‘세계’는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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