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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기] 오해도 이해라지만



얼마 전 겪은 일이다. 한 방송기자가 짧은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이번 경험은 꽤 불쾌하고 의아한 기분이 남았다. 특정한 발언을 기자가 은연 중에 요구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께름칙했는데, 심지어 그는 나에게 딱 이대로 멘트를 해줬으면 한다면서 직접 시연까지 해보였다. 기자는 분명히 이 인터뷰가 특정 주제에 관해 연구를 수행한 유일한 연구자를 취재하는 전문가 포지션의 인터뷰라고 말했는데. 그 상황에서 나는 내가 내 몸에 붙어 있는 연구자라는 상징자본을 방송국에 내어주는 하나의 기계부품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갈등회피형에 가까운 나는, 마치 방송멘트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 멘트 그대로 연기를 할 능력이 내게 없다는 듯이 연기를 하면서 상황을 모면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기자가 원하는 그 말을 끝까지 하지 않았고, 며칠 후 보도를 보니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 촬영분은 완전히 편집되었다. (실은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내가 왜 기자의 전화 자체를 회피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약간은 극단적인 사례를 겪으며 그 이유를 다시 깨달았다. 기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내가 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는 여러 층위에서 쌓인다. 첫째, 대화의 주제가 되는 문제의식은 온전히 기자의 것이다. 기자들은 주로 ‘청년’이라는 키워드가 겹친다는 이유로, 나를 질문을 던지기에 적합한 사람이라 판단하고 연락을 해 온다. 그러나 ‘청년’과 관련해 세부적으로 기자가 다루고자 하는 딱 그 문제의식에 관해 나는 이전에 연구하거나 고민한 적이 없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래서 ‘청년’을 연구해보지 않은 사람과 특별히 다르지 않은 수준에서만 답변이 가능한 경우가 꽤 있다. 이런 경우 굳이 나여야만 좋은 기사에 도움이 될 이유가 하등 없다.


둘째, 열심히 이야기를 하더라도 내 발언은 기자에 의해 취사선택된다. 구체적으로 어떤 관점에 입각해서 이 문제를 보는지에 따라 질문하는 사람과 답해야 하는 사람 사이의 간극이 엄청나게 큰 경우들이 많다.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자주 겪는 문제 상황이 있다. 나는 분명 연구자로서 커리어를 쌓아오는 모든 시간 동안 세대 차이를 과장하는 문제를 지적해 왔는데, 많은 기자들은 나에게 청년세대와 기성세대가 ‘다른 이유’를 굳이 물어오곤 한다. 기자와의 통화는 때론 15~20분이 넘게 길어질 때도 있는데, 내가 아무리 그 시간의 대부분을 세대 차이를 과장하지 않아야 할 이유에 관해 떠들어도 기사에는 아주 찰나 세대 차이의 가능성에 관해 언급한 그 한 마디가 인용되는 일이 꼭 생겨난다. 이러한 일은 신문 기사, 방송 뉴스, 다큐멘터리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내가 한 말이 아닌 건 아니지만, 해당 이슈에 대한 전반적인 내 의견을 대표하기에는 지엽적이라고 스스로 여기는 멘트가 주로 쓰인다.


물론 내 능력 혹은 성향상으로 보도에 적합한 수준으로 복잡한 것을 단순화해서 말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문제 등도 있겠지만, 어쨌든 가장 크게는 앞서 설명한 두 이유로 기자의 전화를 꺼리게 되었다. 모르는 번호는 가능하면 받지 않는다. 혹시라도 받게 되면 우선은 거절 의사를 밝히려 하지만(서두에 언급한 최근 사례에서도 처음에는 명확하게 거절했었다.), 재차 부탁을 하시면 (저널리즘 관행상 전문가 코멘트가 얼마나 중요한지, 하지만 또 얼마나 얻기 힘든지 알고 있기에, 아니면 가끔은 그래도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코멘트가 들어갈 자리에 내 생각이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치기 어린 마음이 들기도 해서) 웬만하면 응하는 편이기는 하다. 그러나 꼭 그렇게 멘트를 하고 나면 내가 했다는 그 멘트를 보며 나 스스로가 너무 바보같이 느껴져 우울한 기분이 되어버린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요지는 이렇게 멘트를 취사선택하는 ‘기자들은 기레기다’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맥락이다. 나는 극소수의 기자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일을 충실하고 진정성 있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기자들과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겪는 나의 어려움은, 오히려 일정한 리터러시가 있다고 여겨지는 직업군의 사람들끼리 상호간에 어느 정도 호의를 가진 상태로 소통할 때조차 얼마나 많은 어긋남과 오해가 발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오해하는 것 또한 이해의 일종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재현의 권한이 나 자신에게 없는 상황에서 오묘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은 또 어쩔 수 없는 일일 테다.


그 오묘한 마음을 늘 느낀다는 것을 역지사지로 승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내 본업으로 돌아오면, 타인의 이야기와 타인의 모습 그 자체를 다시 재현해내는 종류의 권력을 연구라는 과정을 통해 늘 사용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기자와 연구자 사이의 권력 관계는 1회성이 아닐 가능성이 높고, 연구자가 어쩌면 기자 이상의 상징자본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상대적으로 평등하다고 할 수 있음을 생각해볼 때, 연구자와 연구참여자 사이의 관계는 좀 더 불평등하고 일방적인 관계로 나아갈 우려도 크다. 그러므로 질적연구 과정 속에서조차 나는 (계량되는 발화 시간과는 무관하게) ‘듣기’보다는 ‘말하기’를 더 많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녹취록을 여러 번 읽으면서도 참여자의 서사보다는 내 서사 위에서 문장들을 뽑아내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성찰해야 한다. 끝없는 반성 없이는 윤리적인 연구, 타당한 연구에 대한 아무런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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