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우] 일상과 공간, 그리고 권리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며 숱한 사람들을 보게 된다. 특히 서울이라는 대도시 공간을 거닐다보면 우리는 다양한 얼굴만큼이나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일상과 그를 구성하는 숱한 보행과 움직임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 공간의 가시성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도시 공간의 가시성이 다양한 사람들의 행위로 구성되었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도시 공간의 가시성이 배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얼마 전 서울에 거주하는 다양한 시민들에게 이동성을 제공하는 지하철과 관련하여 소요가 있었다. 이는 장애인 활동가들의 시위가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에게 불편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이는 많은 이들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아마 전반적으로 급박하게 돌아가는 동시대의 삶의 단면에서 고장 등의 이유로 지하철이 제공하는 이동성의 지연으로 인한 경험을 상기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지하철에서 시위를 하게 되었는가? 이는 이동권을 비롯한 장애인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예산 배정과 정책 집행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이번 지하철 기습 시위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지만, 장애인 활동가들의 이동권을 비롯한 권리에 대한 시위는 수 십 년간 지속되어 온, 아직도 승인되지 않은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장애인 활동가들의 지하철 기습 시위를 둘러싼 논란이 타오르는데 기름을 부은 것은 이제 집권 여당이 되는 한 정당 대표의 SNS 포스팅이었다. 그는 장애인 활동가들의 이번 시위에 대해 “최대다수의 불편”에 의존하여 관심을 얻는 방식이라며 이번 시위를 비판하였다. 동시에 자신이 속한 정당은 장애인 이동권에 무관심하지 않으며, 그와 관련한 저상버스 확대 도입 등 다양한 정책을 반영하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사실 이번 기습 시위가 화제가 되긴 했지만, 이동권을 비롯한 이들이 도시에서 ‘시민’으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한 권리를 주장하는 시위는 앞서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수 십 년 동안이나 지속되어왔다. 그렇다면 그간의 정권들이 이들을 대놓고 배척했기에 이들이 시위를 지속해왔을까?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어떠한 정권도 장애인을 차별하겠다는, 그들을 위한 정책을 펴지 않겠다는 정권은 없었다. 또한 기존의 여러 정권들은 장애인 인권 개선을 위한 정책을 펴겠다고 약속해왔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즉, 이번 시위는 지켜지지 않은 약속을 촉구하기 위한 투쟁의 지난한 역사의 한 국면이라는 것이다.
서두에서 우리는 도시 공간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얼굴들 중에 장애인은 얼마나 될까? 또한 많은 사람들이 교통하는 지하철 플랫폼에서 휠체어를 탄 장애인은 그 공간에서 얼마나 이례적인 존재로 인식될까? 애당초 이들이 지하철을 비롯한 다양한 이동성의 교통 공간에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그렇게 익숙치 않은 일로 인식되어 왔고, 여전히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할 것이다. 그렇기에 승강장과 지하철 사이의 틈새에 휠체어 바퀴가 끼어 열차가 지연되고, 저상버스의 휠체어 리프트 작동으로 버스가 지연 운행을 하는 것은 우리에겐 숨가쁘게 돌아가는 일상을 지연시키고 불편함을 안겨주는 작은 사고로 인식된다.
하지만 우리가 장애인들이 비교적 낯선 존재로 인식하는 것과는 달리, 실제로 우리 주변엔 많은 장애인들이 존재한다. 지난 4월 19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1년도 등록 장애인 현황>을 살펴보면, 2021년 기준 우리나라의 등록 장애인은 약 264만 5천명이며, 그 중 지체장애인의 비율은 45.1%를 차지한다. 절대적인 수로도 전국민대비 비율로도 적지 않은 숫자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우리 주변의 일상을 구성하는 보편적인 얼굴 중 하나로 존재할 수 있을텐데, 왜 이들은 잘 보이지 않는 것인가? 이는 아마 우리 일상적으로 누리는 도시 공간의 곳곳이 장애인들에게 친화적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일례로 서울 도심의 지하철역에서 대체복무를 했던 내 경험을 토대로 상기한, (모든 이들이 같지는 않겠지만) 휠체어를 탑승한 장애인의 지하철 이용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휠체어 이용 승객의 호출이 오면 공익근무요원이나 직원은 해당 승객이 있는 곳으로 이동 후 휠체어 리프트를 작동하여 플랫폼으로 내려간다. 이후 열차가 도착하면 휠체어 바퀴가 열차에 빠지지 않게끔 미리 준비한 발판을 대어 휠체어 이용 승객의 지하철 탑승을 보조한다. 그리고 지하철 순회 근무 중 이마저도 역무원들에게 부담을 지운다며 자력으로 지하철역을 이용하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더 큰 불편함을 감수하는 이들을 수 없이 마주쳤었다. 물론 십 수 년이 지난 일이기에 지금은 역사 내 엘리베이터 설치 확대 등으로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상호간에 번잡한 절차가 있었다는 것은 애당초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들을 비롯하여, 신체에 불편함을 지닌 이들에게 도시의 일상적 공간들은 그렇게 친절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방증한다.
더불어서 도서관이나 학교를 비롯한 공공시설을 돌이켜봐도 장애인들을 위한 장치가 전무한 경우는 상당히 많다. 아니면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이 구비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다수 시민의 불편”을 이유로, 장애인들에게 불편함을 가중시키는 방식, 그래서 이들을 비가시화시키는 형태로 도입된 경우가 다반사다. 내 지하철 역 근무경험만 돌아봐도,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역사 플랫폼으로 가기 위해 두 번 갈아타야하는 앨리베이터를 이용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제기된 민원을 숱하게 접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시위는 논란 이외의 여러 지점을 환기한다. 먼저 이들의 시위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개인적인 경험을 구성했던 도시 공간의 물적 기반이 여전히 미흡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러한 지점에서 한 정당 대표의 SNS 포스팅에서 언급된 “불특정 다수 시민의 불편”은 단순히 장애인들의 공공시설 이용을 겨냥할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장애인들에게 장벽으로 다가오는 도시 공간 곳곳의 기반 시설을 향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시위 – 사실 시위라고는 하지만 이번 시위는 장애인들에게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일상의 일에 해당할 것이다 – 로 인한 불편과 그로 인한 “불특정 다수 시민”의 불만은 같은 사람, 같은 시민임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특정 주체들을 고려하지 않은 방식으로 설계-배치된 도시 공간의 물리적 구성을 향해야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기실 도시는 다양한 이들의 행위로 구성되고, 도시를 구성하는 수행은 가시화된 존재로서 그 수행의 주체를 드러낸다. 하지만 우리가 도시 공간을 거닐며 마주하는 일상에서 장애인을 비롯한 여러 소수자들의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 드물다는 것은, 그들의 일상이 우리의 일상과 만나는 지점을 도시 공간이 제대로 보증하지 못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물론 그렇다고 장애인을 비롯한 다양한 소수자들의 존재와 그들의 다양한 수행이 도시 공간을 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수행과 존재 역시 소위 ‘보통의 시민’이라 호명되는 이들의 그것과 같이 도시를 구성한다. 하지만 지금껏 도시는 그들을 이례적인 존재로서 인식해왔다. 이는 도시 공간 내에서 어떠한 행위를 하고, 도시 공간 내에서 존재하는 모든 이들에게는 동등한 몫의 권리가 주어져야 하지만, 그러한 권리가 지금껏 기울어져왔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지하철과 장애인 이동권을 둘러싼 작금의 소요에서 우리가 촉구할 것은 무엇인가? 이는 아마 지하철 지연에 대한 볼멘소리보다, 장애인 이동권을 비롯한 다양한 주체들의 도시에 대한 권리가 조속히 보장되어야 함이 아닐까 싶다. 순간의 불편함보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어떠한 주체든 자연스럽게 도시 공간의 일상 속에 녹아들어있는, 그 누구도 그 존재로 인해 이례적인 일로 취급받지 않는 사회를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함이 맞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