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NX신문연] '패러다임 전환기'의 문화정책 연구

최종 수정일: 2월 18일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채태준



1.


‘문화정책의 공급자 중심성을 탈피해야한다’. ‘문화정책 내의 예술 대 문화라는 이항대립을 무너뜨려야 한다‘. ’중앙집권적인 문화정책의 전달체계를 탈피하고 지역분권을 이룩해야 한다‘. ’문화 생산자와 향유자라는 구분에 반해야 한다’. 지난 십수년 간 문화정책과 관련한 담론의 장 속에서 제기된 이야기들이다. 무너져야 할 구체제들, 예컨대 공급자중심의/ 이항대립적인/ 중앙집권적 ’문화정책의 문화‘란 주로 ’문화의 민주화‘로 요약된다. 도래해야할 미래로서 언급되는 건 ’문화민주주의‘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문화정책적 변용으로 거칠게 갈무리 할 수 있는 이 기획은 국내에서는 2000년대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바 있다. 물론 이 패러다임의 전환이란 넓은 사회적 맥락과 조응했으리라. 90년대를 거치며 허위의식으로서 ‘이데올로기’가 아닌 새로운 전장으로서 ‘문화’가 등장하고, 사회운동의 영역에서는 ‘일상’이 주요한 개입의 영역으로 부상했으며, 2000년대 중반 이후 마을/공동체 등을 지원하는 정책들의 등장으로 대표되는 ‘사회적인 것’이 제도와 연결되며 재조정되는 과정이 그것이다. 문화민주주의란 좋은문화를 보급하는 정책에서부터 ‘좋은문화와 그렇지 않은 문화’, ‘예술 대 문화’ 등의 이항대립을 부수는 문화정책으로 이행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서울문화재단에서 2017년부터 운영중인 ‘생활문화’와 ‘지역문화(N개의 서울)’는 이 같은 문화민주주의 패러다임에 기초해 등장한 있는 한 쌍의 정책이다. 2014년 <지역문화진흥법>을 동력으로 삼았고, 서울에서 앞서 운영되었던 ‘시민예술’‘커뮤니티아트’‘마을예술’과 같은 개념들을 인용하며 두 정책은 등장했다. 생활문화는 정책 대상으로 ‘시민’을 호출하고 문화예술활동을 매개로 이들이 ‘공동체’를 만들길 기대했다. 이때 문화예술은 시민의 사회적 관계망을 향상시키고, 공민으로서 시민들이 자신의 정치적 권리와 책임에 관해 배울 수 있도록 유도한다는 점에서 주요했다. 서울의 생활문화정책이 시작될 즈음 진행된 2017년 ‘서울시 생활문화예술동아리 활성화 방안’에 관한 연구 속에서 생활문화정책을 통해 발굴되어야 할 공동체의 ‘최종모델’이 거버넌스였음은 이를 잘 보여준다.

생활문화가 ‘시민’을 호출하는 기획이었다면, 지역문화는 보다 느슨한 틀거리를 지녔다. <지역문화진흥법>을 비롯해 2000년대 말부터 진행된 지역소멸과 도시재생이라는 동전의 양면 격의 담론들 속에서 지역문화와 관련된 문화정책들이 지역을 관광객 시선에 입각해 상품화에 용이한 미학적 대상으로 환원하고 있다는 문화연구/기획자들의 호소가 있었지만, 서울의 경우는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서울의 지역문화정책에서 주요 요인은 2017년 해당 정책의 탄생과 함께 급증하기 시작한 서울 내 자치구문화재단의 존재로 보였다. 지역문화정책으로서 N개의 서울은 ‘지역문화진흥’을 위해 지역문화재단이나 기관에 예산을 지원하고 ‘자율적’으로 사업을 집행하는 일을 지원했다. 하여 특정한 정책 대상을 상정하고 지협적인 정책목표를 ‘이미’선정해둔 광역 단위의 ‘사업’이라기보다는 광역문화재단이 지닌 ‘자원을 분배하는 정책’에 가까웠다.

정리하자면 생활문화정책은 ‘시민’을 호출했으며, 시민이란 ‘문화예술과 관련한 비전문성’을 가정했고 한편에서는 대자적 존재로서 자신의 공적 권리와 책임에 관해 ‘알아챈 자’를 의미했다. 생활문화정책은 문화예술을 통해 전자를 후자로 바꾸어 놓는 기획이었다. 반면 지역문화에 경우 특정한 ‘정책’보다는 자치구문화재단의 시절에 광역과 기초자치구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한 자율적이고 느슨한 ‘자원의 분배’에 더욱 가까웠다.


2.

그러나 이 두 정책은 곧바로 이들 정책이 기초한 패러다임으로서 ‘문화민주주의’에 반하도록 설정되었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비판들은 주로 ‘생활문화’정책을 향했다. 2017년 생활문화정책의 등장 이후 줄곧 제기된 지적은 생활문화정책이 정책 대상을 ‘동아리’로 한정한다던가, 장르예술 활동만을 지원한다는 점이었다. 지역 내 공동체 형성을 지원한다면서 문화예술을 매개한 공동체를 너무 협소하게 본다는 점(동아리), 문화를 ‘장르예술’로 협소하게 정의하고 있다는 점 등이 문제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동아리 수’ 등 정량적 지표들을 강하게 요청했다는 점 역시 문화민주주의에 어긋났다. 타당했다. 그리하여 ‘공동체’와 ‘시민성’에 대한 조작적 정의가 너무나 경직되고 물화되었다는 비판을 수용하고 보완해 2019년에는 ‘생활문화정책2.0’이 등장한 바 있다.


한편에서는 지역문화정책인 ‘N개의 서울’ 사업의 현시 방식 역시 논쟁을 낳았다. N개의 서울이 암묵적으로 지역 내 ‘전문예술인’을 대상으로 한 사업으로 운용된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문화민주주의 패러다임 위에 올라타 지난 시절의 지리멸렬한 이항대립들과 쟁투하길 원했던 두 정책이 기실 생활 대 지역이라는 정책의 틀거리 내에서 지원의 대상으로서 예술인과 기획자 대 주민(시민)이라는 구별을 다시금 반복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는 문화예술계 내의 생태계적 관점에 반했다. 그렇다 이 역시도 타당했다.


‘지역’과 ‘생활’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라는 물음 역시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올해 서대문구의 ‘N개의 서울’을 참여관찰하며 보게된 모습들은 이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듯 보인다. 참여자 중 다수는 앞선 구분 내에서 ‘전문예술인 또는 기획자’로 불릴 수 있었지만 ‘지역문화’나 ‘지역’을 전경화하여 탐구의 대상이나 발굴의 영역으로 삼기 보다는, 이들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소화했다. 프로젝트의 동기들을 문제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1)코로나라는 국면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 경우, 2) ‘이행기’라는 시기적 불안정성의 요인이 크게 작동한 경우들도 있지만, 너른 차원에서 이 작업들은 모두 일상에 관한 문화적각본cultural script의 협소함으로부터 갈증을 느끼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프로젝트로 읽혔다.


이때 ‘일상’이란 개념은 문화를 넓게 정의하는 한 방식-레이먼드 윌리엄스 식으로 이야기하면 ‘삶의 총체적 양식’-과 정확히 포개어진다는 점에서 분리 불가능했다. 한편 이들의 ‘지역’이라는 공간적 개념 역시 오늘날 문화지리학 내에서 구성적인 것으로서 ‘상호관계의 산물’(the product of interrelations)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일상’과 명확히 분리되지 않았다. 쉬이 이야기하면 일상은 항상 ‘지역’에 기반하고 지역 위의 ‘일상적 삶’의 변화들이 지역의 변화로 이어졌다. 지역문화와 생활문화는 개념적으로도 중첩되고, 종족지적으로 정책 대상을 구분(‘일반’시민과 그렇지 않은 ‘전문’시민)한다는 점에서 엄밀하지 못하고, 생태계적 관점에 어긋났다. 이 일련의 이야기가 지나고, 최근에는 ‘내년부터는 서울문화재단에서 생활문화와 지역문화(N개의 서울)를 통합해 운영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렇다면 비로소 시민 대 예술인, 지역 대 생활 등의 이항대립들을 넘어선 문화정책이 등장하게 되는 걸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3.

문화민주주의를 규준으로 한 재빠른 진단, 평가, 대안의 마련은 2010년대 이후 서울의 문화행정이 겪은 어떤 변화들의 긍정적 결과물일 게다. 그러나 ‘문화민주주의’라는 규준을 잠시 내려놓고 두 사업이 낳은 효과들을 들여다보는 일이며, 왜 두 사업이 이 같은 ‘굴절’을 겪었는가를 들여다보는 일 또한 중요하다. 아니, 이게 더욱 중요하다.


먼저 자치구 내에서 지역문화정책이 ‘예술인’을 대상으로 운영된 연유에는 어떠한 구조적 요인들이 숨어 있을까. 이것이 단순 자율적인 정책에 대한 ‘오해’의 결과일까. 행정가들 또는 기관의 운영을 담당하는 담당자들은 ‘자율적’인 정책인 ‘N개의 서울’을 광역에서 자치구로 넘어와 운영되는 또 다른 정책들과의 관계들 속에서 조정키도 했다. 하나의 사업에 내려진 ‘자율성’이 있지만, 지역 내에서 다른 사업 예를 들어 ‘자치구 생활문화지원사업’ ‘자치구예술교육활성화지원사업' 등과의 구별짓기 과정에서 ‘N개의 서울'의 운영 방향을 조정했다는 의미다. 특히 시민을 ’비전문가‘로 한정하고, 이들의 ‘시민성’을 배양하는 정책으로서의 생활문화정책의 존재는 지역문화정책을 정의하는 과정에서 큰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크다. 사업의 목적에 대한 오해/이해의 문제라기 보다는 문화기관 담당자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자치구 내에서 문화정책의 사업의 운영과정을 결정하는 거버넌스기구들이 ‘공공의 예산’이 중복되지 않고 보다 효율적이고 의미있게 사용되도록 조정하는 맥락 역시 존재한다. 광역에서 자치구로 넘어와 특정한 정책이 실행될 때, 정책은 개별자로서가 아니라 광역이 편달하는 또 다른 문화정책‘들’의 계열체 내에 위치할 수 밖에 없다.


두번째로, 생활문화 정책이 여전히 다수의 자치구 내에서 ‘동아리’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음은 그저 실패로 볼 수 있을까? 다른 프로젝트를 위해 몇몇 자치구의 생활문화정책 담당자들을 인터뷰하며 발견한 특징이 있다. 마을공동체 또는 주민참여 거버넌스의 역사가 깊거나, 자치구문화재단이 설립되고 일정 정도의 시간이 지난 지역의 기초문화재단에서는 광역문화재단이 생활문화의 기조가 동아리를 중심이건, 장르 중심이건 간에 자치구 단위에서 이들 사업을 나름대로 재구조화하였다. 자치구 사업을 구부러뜨려 사용했다는 게다. 이들 자치구에서는 주로 ‘젊은 세대’의 ‘공공사업의 참여경험이 이미 있는’ ‘비-장르적 활동’을 하는 시민들이 주로 생활문화정책에 참여한 바 있다. 한편, ‘신생자치구문화재단’의 담당자들은 주로 고령의/장르적활동을하는/공공사업참여경험이 없는 시민이 참여했다고 구술했다. 문제는 문턱이다. 동시대 ‘동아리를 넘어선 문화공동체’에 대한 감각이 익숙하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세대적(그리고 어쩌면 계층적) 굴절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조금 비약해보자면) 동아리중심으로 운영된 자치구들을 통해 문화정책 내의 ‘공백’에 있는 시민들이 문화정책과 닿게 되었을 때, 이는 교양의 보급으로서 ‘문화 민주화’이며 그저 문화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까.


셋째 ‘생활문화와 지역문화 사업의 굴절된 용례들’은 자치구/자치구문화재단/문화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주체들 간의 이질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문제 그 자체보다는 해석의 대상이다. 예컨대, 자치구문화재단이 팽창하며 문화기획자, 행정가, 공공기관, 마을사업, 제도화된 학문으로서 문화행정, 90년대와 00년대 문화운동 등 서로 간 상이한 문화적 경험과 기억을 지닌 이들이 등장한다. 이를 면밀히 들여다보거나 인정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생활문화정책과 지역문화 정책에서는 담당자들의 역할로서 ‘발굴’이 강조되는데, 이는 낭만적 언표로서 외양과 달리 지난한 ‘커뮤니케이션’이 필요성을 가리킨다. 특히 카카오톡 등의 매체를 경유해 일대 다로 커뮤니케이션의 시공간이 연장되기도 한다. 이처럼 생활문화나 지역문화정책은 문화기관과 문화재단의 담당자에게 강도높은 커뮤니케이션 노동을 요청하는데, 이때 비물질노동 또는 감정노동으로서 개별 담당자들이 처한 노동의 취약성을 살필 필요가 있다. 특히 담당자의 고용형태에 따라 이 노동조건의 취약함이 어떻게 심화되는지 역시 보아야한다.


그렇다. 결론적으로 제안하는 것은 ‘연구’다. 문화민주주의나 특정한 정책패러다임에 기초해 정책의 효과를 가/부로 판단하거나 개념에 대한 본질주의적 고민을 지연시키는 일 말고 연구, 정책보고서나 정책평가 말고 연구, 강한 인력을 지닌 ‘문화민주주의’로부터 조금 떨어져 이뤄지는 대화, 2017년 이후 서울에서 문화정책의 일군의 특이점을 이룬 두 정책이 남긴 흔적들을 살펴보는 더 많은 해석들이 필요하다. 가끔은 (쪼렙 주제에) 비좁은 문화정책연구의 장 앞에서 ‘웃음으로 눈물 닦기’로 문화정책연구의 ‘현장성’을 거론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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