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 노동을 위한 담론의 부재와 부러진 화살



임금상승과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교내 시위를 주도한 청소/경비 노동자들을 대학생이 고소한 일이 있었다. 순식간에 세간의 화두에 오른 이 사건은 2018년 인국공 사태 만큼이나 한국의 세태를 (안타깝게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공정성, 혐오, 차별 등 수많은 키워드들이 이를 이해하기 위한 시도로서 제시되었고, 나름의 시의성을 가진 분석들이 줄을 이어 이루어졌다.


고소한 학생을 두둔했던 ‘누군가’는 자신들이 ‘비난’당하는 현 상황이 약자를 무조건 선하게, 강자를 무조건 악하게 바라보는 ‘언더도그마’라고 비판했지만, 여기서는 선악의 구도가 쟁점이 되기 어렵다. 쟁론은 주로 ‘그 학생’이 ‘왜’ ‘원청’이자 학교 당국이 아니라, 경제적 ‘피해자’인 동시에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를 고소했느냐 하는 의문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목이 집중되어야 하는 지점은 시위로 인해 어떤 부정적 감정이 치밀었음을 느꼈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그 감정이 궁극적으로, 혹은 근본적으로 어느 방향을 가리켰어야 했는지, 라는 것이다. 결국 이 과정에서 중심적인 ‘사회 문제’로 떠오르게 되는 것은 ‘분리’와 ‘단절’, 그리고 ‘사회적인 것’의 위기를 부추기는 경제적 구조다. 그러면서 청소/경비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 실태나 저임금은 ‘여느 때와 같지만’ ‘새삼스럽게’ ‘다시’ 조명된다.


나는 이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을 조금 틀어서, 이와 ‘유사한' 사건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보고 싶다. 이는 연세대 청소/경비 노동자 소송 사건은 물론이고 spc사의 부당 대우에 저항하기 위한 단식투쟁에서도, 화물연대 파업에서도…모든 현재적 ‘노동쟁의’의 연속성을 담보한다. 결국 단 한 번도 쟁의가 ‘해결'된 적이 없거나 관련한 ‘개선’조차도 일회성에 그쳤음을 의미한다. 시대는 변화하지만 체계는 고여 있다. 최근의 불안정성과 같은 노동시장의 문제적 현상들은 단지 “예외상태”로 간주되고, 따라서 우연적이고 삽화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데 머무른다. ‘위기’를 파헤치는 담론들이 결국에는 ‘예외적인’, ‘불안정성’ 등의 용법으로 사회의 변방을 묘사함으로써, 근원적인 이해가 결핍된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둔다. 이러한 맥락에서 노동에 관한 담론은 사회적으로 열등한 것으로서 규범 밖 노동을 ‘묘사’하였을 뿐이고, 그를 ‘위한’ 담론은 막상 제대로 형성된 적이 ‘없다.’


소위 언어적 전회 이후 언어는 단순하게 실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 힘을 지닌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다시 말해서 담론의 존재는 사회를 ‘움직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동안의 노동 담론은 구체적 이해 없이 주변부 노동을 ‘바깥’이나 ‘전락’의 ‘전형’으로 제시했다. 이는 다시금 열등하고 종속된 언어로 인식에 자리 잡으면서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불평등 구조를 재생산한다. 노동시장의 부당한 관행, 저임금, 무시, 차별 등의 위계적이고 서열 중심적인 사고방식은 담론의 형성과 배제의 악순환에서 기인한다.


나는 이번 연세대 청소/경비 노동자 소송 ‘사태’가 노동을 ‘위한’ 담론의 부재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 사회의 인정체계는 담론의 재현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이 맥락을 가져온 이유는 이 사건의 갈등 구도를 특권계층/강자 대 사회적 약자라는 이분법적 프레임만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을 말하기 위함이다. 양측의 세력이 더해질수록 사안과 양상이 복잡해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단순한 프레임 속에서는 갈등의 표피만을 긁어내는 데 멈추고, 우리는 양쪽의 어느 측면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될뿐만 아니라, 그 행간에 발 빠진 채 재현되지 못했던 존재들과 사건들을 끊임없이 외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중랑역에서 근로자와 열차가 충돌하여 사상사고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러한 사건사고들이 또 다시, 무미건조하게도, 이야기되지 않는 일이 되어가는 것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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