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연] 오늘 난 편지를 써야겠어: 노량진 수산시장을 생각하며



오래 전 잠시 후원 했던 사이트를 운영하시는 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정체성이 활동가이기도 한 그분과 초면의 어색함을 무릅쓰고 근황을 나누다가 그간 왜 사이트를 이용하지 않았냐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활동을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했는데, 그러자 ‘활동이란 게 쉴 수 있는 것일까요’하는 질문을 되받았다. 조금 낭만어린 질문이 아닐까 잠깐 생각했지만 이내 반성을 했다. 삶과 활동을 분리할 수 없는 거리 위의 사람들이 무수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언뜻 삶과 활동을 분리할 수 있을 것 같은 활동가라 하더라도 생업으로서의 활동만큼이나 삶으로서의 활동을 강조하는 것이 결코 자기애에 그치는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요즘 같은 때에는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노량진 농성장의 소식을 들었다. 본래의 노량진 구시장에서 노량진 육교로, 철거의 위협을 버텨내면서 지키던 농성장과 더불어 서울시청 앞에 농성장을 새로이 열었다고 했다. 새로운 서울 시장을 맞이하는 농성장인 셈이다. 시청에 입성하던 첫날, 문제 해결을 호소하며 엎드린 상인을 일으켜세우는 오세훈 서울시장의 모습은 많은 기자들의 카메라에 담겼다. 주지하다시피, 노량진 상인들의 싸움은 노량진 수산시장 현대화 사업으로 인해 위태로워진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동작구청과 수협은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구시장 상인들의 생존권, 아니 생명까지도 위협해왔다. 노량진수산시장을 개설한 당사자이기도 한 서울시는 그 책임에 걸맞는 행동을 하기는커녕 회피로만 일관해왔다. 이에 시청 앞에 새로 세워진 농성장은 새로운 시장에게 5년의 방관을 멈추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다.


노량진 근처에서 살고 있는 나는, 지난 5년의 싸움과 같은 시공간에서 살아오면서도 어딘가 다른, 나와 먼 곳에서 파도가 치고 있다고 여기면서 지내왔던 것 같다. 그러니까 ‘활동을 쉬고 있었다’는 나의 대답은 완전히 틀린 셈은 아니다. 서울시장에게 방관을 멈추라고 요구하는 상인들의 목소리를 옮기는 손가락이 부끄럽게 느껴진다면 위선으로 보일까. 노량진 투쟁에 연대 활동을 하고 있는 친구가 있었음에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나가지 않았고, 간혹 기사나 몇 개의 글들을 찾아보는 게 전부였다. 지금 내가 이렇게 노량진 투쟁을 주제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지극히 겉핥기에 그치리란 사실도, 뭐랄까 너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여태 다른 시공간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화 통화를 하고 며칠 후에, 시청 농성장에 매달 응원 족자를 모집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노량진 투쟁을 지지하는 개인이나 단체의 연명을 담은 족자를 달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지금 몸담고 있는 신문연에 이 소식을 전했다. 최근 신문연에서는 사회적 연대의 방식을 고민하는 대화가 몇 차례 오갔기 때문이다. 공유하는 것 자체에 큰 고민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사적인 나 개인에게도, 신문연에 몸담고 있는 연구원으로서의 나에게도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적인 나에게는 그간 어긋나있던 노량진 투쟁의 타임라인과 나의 타임라인을 겹치게 만드는 일이 되었기에 간단하지 않았고, 연구원으로서의 나에게는 아직 이 공간, 신문연이라는 공간과 내가 합의해본 적 없는 사안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에 간단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떠오르는 질문은 이것이다. 하나의 싸움과 나의 타임라인을 겹쳐놓게 되는 것은 우연인가, 아니면 지금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어떤 조건이 충족되면 일어날 수 있는 인과적인 일인가? 만일 후자라면, 우리는 어떻게 더 많은 ‘조건’들을 만들어갈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까? 나의 경우 첫머리에서 말한 전화 한 통은 우연인가, 많은 것들이 겹친 ‘조건’인가? 4월 9일자 칼럼에서 김지수가 냉소 이후를 적극적으로 읽어내기 위해 제시한 ‘직시’가 답을 줄 수 있을까? 김지수의 글에서 ‘직시’ 이후는 삶을 견디는 쪽으로도, 냉소하는 쪽으로도 갈 수 있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우리에게 필요한 방향으로 견인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나아가 도시 공간의 질서를 논한 3월 20일자 칼럼에서 구승우가 이야기하는 “어떠한 신체도 배제되지 않는” 도시의 질서는 어떻게 가능할까?


신문연에 글을 공유하고, 조금의 두근거림, 미묘한 기쁨, 약간의 지난함 같은 감정들을 거쳤다. 게다가 이런 칼럼이라니, 이런 글을 써도 되는 걸까? 이런 다분히 내 안으로 닫힌 것 같이 느껴지는 글이 투쟁에 대한 글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에 휩싸인 나는 문득 꽃다지의 노래 가사를 떠올린다. “오늘 난 편지를 써야겠어/ 전화카드도 사야겠어/ 그리고 네게 전화를 해야지/ 줄 것이 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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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꽃다지의 이 노래가 사적인 감정과 행위의 순간이 겹쳐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아주 아름다운 노래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저 나의 아픔만을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런 입으로 나는 늘/ 동지라 말했는데”라는 마음 속의 회한에서 “편지를 써야겠어/ 전화카드도 사야겠어/ 그리고 네게 전화를 해야지”라는, 행위의 결심으로 넘어가는 그 순간이 내게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준다.



** 본 글은 다음의 자료들을 참고하였습니다.


- 김지수, “냉소에 대하여” (2021년 4월 9일 신문연칼럼)

- 구승우, “지금 여기, 공간의 질서들” (2021년 3월 20일 신문연칼럼)


- 꽃다지, “전화카드 한 장” 노래 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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