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준] 진중권의 '세대', 정희진의 '세대'



8월 19일 '경향신문'에 정희진의 칼럼 “내가 진중권 글에 분노한 이유”가 실린다. 지난 7월 11일 진중권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게재한 ‘86세대 비판’ 게시물에 관한 응답으로서, 정희진의 글이 지닌 요는 다음과 같다. 86세대 혹은 민주화세대라는 호명은 허구이며, 이들에 관한 비판 및 반성론은 세대갈등과 서울대 출신 남성중심주의를 조장한다. 이번 칼럼은 그간 정희진의 글 속에서 등장해온 정치적 미덕을. 몰성적으로 여겨지는 그러나 여성화된 존재들을 구성적외부(constitutive outside)로 삼아 정립되는 지배적 정체성을 젠더화 하는 정치함을, 그대로 구현한다. 민주화‘세대’라고? 민주화세대는 연령코호트가 아니라 젠더, 학력, 계급이 교차하는 60년대생 지배집단의 네트워크라고.


그럼에도 이번엔 정희진의 글이 속 시원한 ‘사이다’로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그의 글에서 어렴풋이 느껴지는 논쟁 상대에 관한 의도된 왜곡 때문이다. 진중권은 정말 86세대를, 연령코호트처럼 사용했는가. 2000년대 ‘논객 르네상스’ 속에서 담론장에 등장한 진중권이 지금까지 지녀온 일관됨이란 반反위선일 것이다. 그가 그동안 시도한 말과 행동, 앎과 삶 사이의 어긋남에 관한 비판의 최신판이 ‘86’이다. 진중권의 해당 게시물은 글 속에서도 언급되었듯 자유와 평등을 위해 ‘운동’에 몸담았던 젊은 시절과, 역설적으로 이와 배치되는 오늘의 실천들, “강남에 아파트”를 가졌고, “인맥을 활용해 자식 의전원에” 보낸 어떤 ‘도덕적 속물’에 관한 비판이었다. ‘조국사태’을 비롯해, 다주택자여서 ‘쓸쓸히, 그러나 호기롭게’ 퇴장했던 집권당 ‘민주(화)’ 세력의 어떤 네트워크에 관한 비판이 아니었을까.


물론, 정희진의 글은 그 내용에서 그릇된 것이 없다. 문재인 정부의 집권 이후 비판학문 내에서 ‘스승’이라 불렸던 어떤 이들의 노골적인 위선이 보여주듯, ‘민주화’의 어떤 세력과 87년 체제라는 한국 사회에서 그동안 ‘대안적’임을 자임했던 집단을 비판하기 위해 이들을 젠더, 학력, 계층이라는 범주를 통해 상대화할 필요가 있다. 이제 너무 익숙해져버린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란 정희진이 언급하듯, ‘민주화시기’라는 대문자 역사를 재독하는 것에서부터 -정희진의 글에 언급되었듯 은폐된 당대의 “성차별, 지역차별, 계급차별”을 가시화함으로부터- 출발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문제의식에 동의하는 학술장의 구성원들은 이 작업을 부단히 지속해오고 있다.


진중권의 글에 대한 정희진의 응답이 엇나간 듯 함을 -물론 모든 수신이란, 상대의 발신에 관한 자의적 굴절을 포함한다 할지라도- ‘굳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한국 사회에서 ‘86세대’에 관한 어떤 용례, 60년대라는 출생코호트에 80년대라는 학벌을 교차했음에도 불구하고 ‘세대’라는 접미어를 통해 연령과 출생의 범주로서 다시 묶여 버리는, ‘86세대’의 아이러니 때문이다. 정희진의 글은 넓은 의미에서 몰젠더적이고 몰계급적인 ‘-86세대 담론의 일반화’를 비판했다. 정희진의 글은 옳다. 그럼에도 정치하지 않다. 세대라는 개념이 지닌 본질주의적 한계를 진중권을 비판하기 위해 다소간 ‘이용’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진중권은 정말 ‘86세대’를 연령코호트로서, 성별과 학력을 ‘소거한’ 60년대생 집단 전체로 상정하거나,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인물군 전체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했을까.


‘86세대’ 혹은 ‘민주화 세대’라는 개념은 연령범주를 통해 ‘민주화’를 위한 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을 동질화하며 세대 내부 성별, 계급 등의 위치성을 지우는 식의 효과를 유발한다. 그렇다면 정희진이 지적한 것 처럼 ‘민주화세대’라는 개념을 경유한 비판론은 무조건적으로 기각되어야 할까. ‘민주화세대’라는 개념을 경유한 비판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민’중의 ‘주’권에 관한 낭만적 상상을 특정한 연령코호트가 선취한 것으로 상정하기에 폐기되어야 할까. 이 본질주의적 사유 너머로 ‘86세대’라는 단어를 전략적이고 비판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실천들이 있다면, 우리는 이에 무관심해도 괜찮을까. 아니, 허면 모두를 지워내지 않는 안전한 개념을 ‘발명’하는 것이야말로 대안인 것일까.


무릇 다른 범주들이 그렇듯 ‘세대’ 역시도 복잡하고 지난한 개체의 실천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고정하는 한계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론장에서는, 이 태생적 한계를 지닌 범주들을 무지해서가 아니라 특정한 정치적 효과를 위해 구부려 사용한다. (그도 너무 잘 알고 있을) 여성주의 내에서 스피박의 ‘전략적 본질주의’, 미즈의 ‘여성화된 노동’ 등의 개념이 그 구체적 용례다. 그렇다면 세대에 관해 말하는 이들은 왜 ‘예외’가 되어야 하나. ‘86세대’ 혹은 ‘민주화세대’에 관한 최근 한국사회의 담론적 토양들, 특히 이 정부 이후 ‘86비판’을 정치한 방식으로 사유하고자 했던 일군의 실천을 거슬러, 그가 당혹스러울 정도의 납작한 용례로서 교차성(intersectionality)을 사용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세대의 동질성을 과장하지 말라’는 성찰적 담론이 이토록 몰맥락적으로 얹히게 된 이유는 무얼까-. 한국사회에 관해 어느 누구보다 정치한 방식으로 분석해온 정희진이 왜 86세대에 관한 비판에서 지극히 옳은, 그렇기에 지극히 비정치한 응답을 써낸 이유는 무얼까. 세대라는 범주는, 왜 이토록 쉽게 담론의 송신과 발신의 엇갈림을 유발하는가. 세대는 왜 이토록 쉽게, ‘엇갈림’을 위한 빌미로서 언급되는가. 세대는 왜 이토록 쉽게, 한계로만 등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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