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4일부터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상연중인 연극<물고기로 죽기>는 트랜스젠더 작가인 김비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트랜스젠더의 삶을 고통과 환희, 억압과 자유로 환원하지 않는 이 극은 그녀가 겪어온 삶의 순간’들’에 관한 아카이브다. 이질적이고 혼종적인 문서고로서, 그녀의 삶은 선형적인 방식으로 서사화 될 수 없는 분열적인 조각들의 모음으로 이뤄져 있을 게다. 때문에 어떤 장면을, 또는 어떤 정서를 전경화하는 일에 조심스러운 이 극은 삶의 어떤 굴곡도 깔떼기를 씌워 서사적으로 이용하지 않는다. 가족에 관한, 글쓰기에 관한, 사랑에 관한 삶의 순간들은 모두 희비가 얽힌 뭉테기로서 등장한다. 그때마다 키라라의 비트가 공간을 채우고, 무대 뒤의 배경엔 실시간으로 수화가 투사된다.
하지만 이 극 속에서 등장했던 에피소드들, 가족, 사랑, 여행, 문학 등과 관련한 무대 위 배우들의 몸짓과 말들은 시간 순서대로 읽히기도 한다. 삶은 조각들이지만, ‘이 몸’은 그 자체로 문서고이고, 역사적이다. “나에게 오십은 트로피 였다”고 작가가 어느 칼럼에 썼던 것처럼, ‘자연사가 꿈’이라는 작가의 말은 ‘퀴어한’ 삶들의 ‘우울’을 생산하는 문화적/담론적/제도적인 힘과 동시에 ‘삶’에 관한 담대한 의지를 보여준다. 이 몸으로, 삶의 다양한 굴곡과 면면들을 기꺼이 살아내면서, X와 Y 염색체의 배열과 몸의 특정한 차이를 성별화하는 법적이고 담론적인, 그리하여 문자적인 억압 하에서 여전히 ‘문자쓰기’를 통해 -그녀에게 저주인 동시에 구원인 ‘글쓰기’를 통해서- 스스로의 문서고를 채워가는 삶에 관해 연극은 논한다. 울다가 웃다가, 아니 절규하듯 소리치다가 발랄한 목소리로 퀴어 만세를 외치면서 말이다.
연극의 제목이기도 한 “물고기로 죽기”로 돌아오자. 배우는 반복해서 ‘물고기로 죽고싶다’ 외치거나, 물 속을 유영하는 듯 몸을 흔든다. 이때 ‘물고기’라는 단어는 복잡한 감응을 유발한다. 일면 물고기란 인간적이고 문화적인 억압적 체계 바깥의 ‘피안’의 상징 같지만, “우리는 모두 물고기였는지도 모른다”는 극 속의 문장이 이야기하듯 반인간(Anti-human)의 알레고리로만 갈음할 수는 없다. 물고기로 태어나-어떤 몸의 물 속을 유영하다가 세상 밖으로 나와-, 인간으로 길러지지만, 다시 물고기로 죽기를 ‘택하는’ 것은 모든 분류체계들을 그리하여 종적인 분류체계마저 완벽하게 초월한 삶이라기보다는, 끊임없이 이 분류체계를 상대화하는 삶일 게다. 차이들이 사라진 삶 보다는, 차이 배타적으로 구성하는 힘, 차이를 위계화하는 힘들에 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삶일 게다.
연극을 보며 이따금 지난해 번역되어 출간된 수나우라 테일러의 <짐을 끄는 짐승들> 속의 어떤 장면들이 떠올랐다. 이 책은 장애운동과 동물운동 사이의 교차적 접근을 모색하며 인간중심주의와 인간 내의 규범적 신체성을 통해 누군가를 차별하는 비장애중심주의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논한다. 책의 중반에 이르러 장애인이기도 한 저자는 ‘동물임을 선언하기’를 주장한다. ‘나는 동물이다’라는 수나우라 테일러의 선언은 ‘인간’이라는 규범적인 주체와 그 신체성을 상상하는 방식을 상대화하고, 구성적 외부로 여겨진 존재들에 관해 복기한다는 점에서 ‘물고기로 죽겠다’는 트랜스젠더의 목소리와 연결된다. 나는 이 선언들에서 형상과 실체로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규범적 형상과 신체에 관한 질문으로서 등장한 ‘포스트휴먼’을 본다.
(한편 21분 내의 교통거리로 서울을 재구성하겠다며 ‘이동성의 역능’-또는 부동산-을 숭배하는 ‘속류 포스트휴먼’도 있다. 집권당의 서울시장 후보인 그는 3월 11일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서울퀴어문화축제에 관해 “저의 생각을 표현하기 전에 서울시민과의 공감대 형성이 먼저 더 중요하다”는 입장없음으로 포장된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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