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준] 동료 혹은 연인



한국사회에서 재현물을 통해 상상된 궁궐들은 저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동성사회적인 설정에 기대왔다. 집현전과 수라간, 대신전과 침소. 이때 궁궐 속 ‘그들만의 리그’로서 남성 엘리트 사회의 폐쇄성은 반대편에서 일탈적인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당대의 지배적인 관계양식에 포섭되지 않는 ‘그들’의 사이의 관계, 왕과 신하라는 경직된 관계 너머로 흘러넘치는 미묘한 감정들이 (너무 당연하게도)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 말이다. 영화 <천문>은 이처럼 합리적이지만 금지된 가정을 스크린 위에 투사한다. 그것도 굉장히 잘 알려진 위인들을 통해서. ‘세종은 장영실을, 장영실은 세종을 사랑했을지도 모른다’라며.


하지만 이 영화를 퀴어 영화로서 권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많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지닌 마음은 ‘마치 사랑처럼’ 제시되지만, 이때 영화가 그리는 ‘사랑’은 (허진호 감독의 전작 속 대사이기도 했던)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류의 멜로드라마 코드 너머로 나아가지 못한다. 영화 내내 강조되던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 또한 서사 말미에서 대국의 속국이 지닌 금지된 ‘꿈’, 천문을 통해 자국의 시간을 한글을 통해 자국의 문자를 갖는 꿈에 관한 처벌로 빠르게 정리된다. 두 인물이 한국 사회의 역사적 콤플랙스를 상상적으로 해우하거나 체현한다면, 그 과정에서 들어서는 ‘민족’이라는 단어는 두 인물의 신분과 그들의 관계가 지닌 다양한 이질적인 차원들을 빠르게 갈무리한다. 이 서사를 퀴어로 착즙하자면 그럴 수야 있겠지만(그리고 나름의 의의가 있겠지만), ‘굳이’라는 생각이 들법하다. 심지어 비슷한 시기에 <윤희에게>라는 훨씬 본격적이고, 유려한 ‘퀴어영화’가 개봉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지닌 (보편적이지만) 주목할 만한 기이(Queer)함 또한 있다. <천문>이 ‘군신관계’를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대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장영실 역의 최민식이 지닌 충심은 어떠한 유혹에도 굴하지 않는 신하의 미덕 보다는, 지난한 질투를 거쳐서 탄생한다. 천문학에 몰두하던 세종의 관심사가 이제 한글창제로 이동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저를 잊어버리신 줄 알았습니다’라는 장영실의 반응은 ‘이제는 저의 처소에 들지 않으실 건가요’라는 왕후나 후첩의 푸념과 그리 다르지 않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군신이라는 ‘선’을 결코 넘어서지 않는다.


사랑 같으면서도 군신관계 같은 영화 속 장영실과 세종 사이의 관계는 관객들을 ‘낚는’ 퀴어베이팅(Queer baiting)이나 날것 그대로 드러날 수 없어 봉합된 ‘대중영화 속 퀴어함’이 지닌 숙명 일 수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이 같은 구도 속에서 우리는 사랑과 군신관계 사이의 친연성을, 오늘날 다양한 관계의 이름들이 얼마나 불안정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영화 <천문>은 천문학에 관한 지식을 공유하는 ‘군신’의 관계가 연인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셈이다. 밤하늘의 별들에 서로의 이름을 붙여주는 클로즈업쇼트들은 섹슈얼한 긴장감 보다는 고루함을 불러일으킬지라도, 이 모든 감정의 동학이 함께 ‘앎’을 공유하는 것(천문학에 대한 탐구)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사랑과 앎의 경계를 재고해보도록 만든다.


군신과 연인, 함께 앎의 탐구하는 일과 사랑. 이미 어떤 철학자는 ‘진리의 절차’에 관한 은유로서 사랑을 말한 바 있다(알랭 바디우). 공교롭게도 이 짧은 글을 쓰는 순간은 함께 공부하고 동시에 서로를 보듬는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동료들과 새 해를 준비하는 무박의 이일의 긴 회의를 마친 뒤이다. 함께 대안적인 학술공동체를 만들어보자던 우리는 ‘학문후속세대 동료’라는 건조한 단어에 어울리지 않는 지난한 마음씀-염려, 서운함, 기대, 실망 그리고 사랑-을 공유하며 한 해를 버텨왔다. 요즘엔 공부를 사랑하는 것인지,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된 것인지 자주 헷갈린다. 그때마다 내가 상대에게, 상대가 나에게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를 떠올리게 된다. 좋은 동료가 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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