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에 포스트-트루스(post-truth)라는 말이 영국의 한 매체에 의해 '올해의 단어'로 선정되는 일이 있었다. 객관적으로 검증된 사실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사실이라고 믿고 싶은 사실이 '사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가는 사태에 대한 명명이었다. 포스트-트루스를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탈-진실인데, 한국에서도 가짜 뉴스 이슈가 커지면서 제도권 정치와 저널리즘 지형에까지 큰 영향을 주게되어 큰 관심을 얻고 있다. 이용자들이 적극적으로 정보를 생산하고 실어나를 수 있게 만든 SNS 등 새로운 미디어의 확산이 우선 포스트 트루스의 물질적 기반을 마련했다. 초반에는 트위터, 카카오톡 등을 통해 정보의 생산자가 명시되지 않은 텍스트들이 공유되는 방식으로 퍼지다가, 지금은 유튜브를 통해 유사 언론의 형태로까지 발전했다. 가장 비근한 사례는 2020 총선 개표 조작설을 주장하고 있는 미래통합당 민경욱 의원과 '보수 우파' 유튜버들의 콜라보래이션이다. 이들은 노트북에 '윈도우10이 깔렸다'는 것이 개표 조작의 증거라고 주장할 정도로 엉터리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면서 연일 톱뉴스가 되고 있다.
앞서 말했듯 탈-진실은 정서에 호소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객관적인 사실 관계와 논리적 정합성이 아니라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믿고 싶어하는 것을 기꺼이 이야기해줌으로써 사실의 지위를 얻는다. 그런데 정서적으로 믿고 싶어하는 것을 믿으려 드는 것은 인간의 동물적 반응에 가깝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인간의 객체에 대한 경험은 그 객체가 일으키는 신체의 변용과 그것을 인식하고 관념을 부여하는 두 단계를 거친다. 이 신체의 변용에 대한 관념이 곧 상상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객체에 대한 경험과 인식은 관념적이기 이전에 정서적인 느낌에 가깝다. 그 정서가 긍정적이었다면 긍정적인 관념이 부여되고 이런저런 논리가 더해지면서 객체는 정당하고 옳은 것으로 탈바꿈하며, 반대의 경우엔 객체는 부당하고 틀린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의 정서적 특성에 대응하여, 사실을 다루고 전파하는 제도로서의 근대적 저널리즘은 객관주의, 중립성 등의 윤리적 규준을 나름대로 마련하면서 전문적인 영역으로서의 입지를 구축해왔다. 사실이라는 것의 생산을, 정서를 넘어서는 객관성의 영역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노력은 저널리즘이라는 근대적인 분야가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자기재생산하기 위한 문화정치적 전략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이 덕에 근대적인 '사실'은 느낌이나 '호불호'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객관적인 팩트'로서의 지위를 획득했다.
반면 유튜브 등의 새로운 미디어를 통해 유통되는 '사실'들은 근대적인 저널리즘의 규준들을 비켜나 있다. 전통적으로 저널리즘 행위자 혹은 사업자는 일정 정도의 경제적, 인적 규모를 갖추어야만 의미있는 수준의 저널리즘을 수행할 수 있었고, 따라서 그 수가 늘어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수가 그렇게 많지 않다보니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관리∙규제될 수 있었다. 저널리즘 행위자 집단이 전문직주의를 표방하며 나름대로 자기 규제하는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유튜브 등을 통해 '사실'을 유통하는 주체들은 이러한 저널리즘의 한계로부터 벗어나 있다. 관리와 규제의 대상이 되기 어려울 뿐더러 자기 규제하는 전문직주의 또한 없다. 행위자의 모습은 비슷한데, 관리 체제가 벗겨져 버린 형국이다. 공적인 사실 검증이 불가능하다.
특정한 유튜버나 정치인 등 인물을 중심으로 사실이 유통된다는 것 또한 문제적이다. 전통적인 저널리스트 중 존경받거나 인정받는 인물들은 개인의 매력이나 정서적 가치가 아니라 그가 훌륭히 지켜낸 저널리스트로서의 윤리와 규준들에 의해 평가 받았다. 그러나 탈-진실의 생산자들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좋아할만한 개인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인기를 끈다. 인물은 대중적 주체들이 그것과 스스로를 동일시하고 감정적인 유대를 만들기에 가장 적합한 기호이다. 인물 중심의 사실 유통이 탈-진실의 정서적 측면을 더욱 강화한다.
사후적인 사실 검증을 통해 탈-진실 중 '진실'을 추리는 작업이 가능하다고 해도 여전히 한계적이다. 탈-진실은 사후의 검증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이미 사실로서의 효과를 발휘한다. 탈-진실의 형상으로 저질러지는 소수자 혐오와 같은 폭력은, 마치 엎질러진 물처럼 온전히 주워 담을 수가 없다. 정서 그 자체에는 윤리가 없다. 정서를 윤리와 규범으로 잘 벼려내려는 노력이, 탈-진실의 시대에 여전히 소중한 객관적 진실을 추려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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