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4년 전 잘못 보낸 문자 덕분에 흑인 손주가 생긴 백인 할머니’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었다. 기사는 미국 애리조나에 사는 완다 덴치(Wanda Dench)가 손주에게 보내려던 추수감사절 저녁 식사 초대 문자를 자말 힌턴(Jamal Hinton)이라는 청년에게 잘못 보낸 상황에서 시작된다. 자말과 완다는 서로 사진을 교환한 후 문자가 잘못 전달됐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추수감사절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우리 할머니는 아닌데, 저녁 식사하러 가도 되냐”는 자말의 제안으로 4년째 추수감사절을 함께 보내고 있다는 내용이다. 정확한 장소로 전달되지 못한 문자로 두 사람은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게 되었다.
2017년 여름이었다. 나와 가족들은 한 달 동안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 환경에 적응하기 전까지 우리는 눈으로 확인 가능한 거리를 유지하며 걸었다. 하루가 더해갈수록 걷는 속도에 차이가 발생했고 길에 익숙해지면서부터 둘, 셋을 나누어 걷기 시작했다. 동생이 다리를 다친 어느 날, 나와 동생은 버스를 타고 약속한 숙소 앞에 일찍 도착해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100m쯤 앞에 오는 언니와 형부를 발견한 나는 반가운 마음에 양손을 높이 들고 “올레!” 하고 외쳤다. 둘을 향해 걷는데 함박 미소를 머금은 외국인 할아버지가 시야를 가렸다. 할아버지는 무척이나 반가운 얼굴로 “올라!”라 외치며 나를 향해 양팔을 벌리셨다. 전달 오류였다. 언니 부부를 향한 마음을 중간에서 전달받아버린 할아버지를 외면할 수 없어서 나도 ‘올라’라 외치며 양팔을 벌려 할아버지와 포옹했다.
체크인을 하고, 시골길 30km를 걷느라 흙먼지를 뒤집어쓴 등산복을 세탁하기 위해 세탁실로 향했다. 빙빙 돌고 있는 세탁기 앞에서 익숙한 얼굴이 빙그레 웃었다. 내 마음의 오배송지, 할아버지였다. 세탁기가 멈출 때까지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눴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곤라드. 아들은 꽤나 유명한 밴드의 기타리스트이고, 토론토 대학의 지리학과 교수님인 곤라드는 연구를 위해 이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철새에 관한 이야기도 들었다. 가슴에 화살이 꽂힌 철새가 사랑하는 연인을 보기 위해 800마일을 날았다는 이야기.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야기를 전하는 곤라드의 얼굴이 제법 진지해서 사실처럼 느껴졌다. 여행을 마칠 때까지 우리는 길 위에서 몇 번을 더 마주쳤고 그때마다 곤라드는 마르지 않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냈다. 지금도 종종 가족들은 곤라드와 처음 만난 순간을 이야기한다. 곤라드 어깨 너머로 보이던 호탕하게 웃는 언니와 형부의 얼굴과 등 뒤에서 들리던 동생의 웃음소리를 기억한다.
서울에 온지 일주일이 채 안됐을 때 한 선생님과 차를 마셨다. 처음 마주하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어떤 연구를 하는지를 알고 있어서인지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식사 시간을 놓칠 정도로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선생님은 나에게 집에 어떻게 가는지 물었다. 서울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종로에서 혜화까지 지하철을 탈 생각이었다. 선생님은 지하철보다는 버스를 타는 편이 나을 거라며 혜화로 향하는 버스가 있는 정류장에 바래다주었다. 며칠이 지난 후 그때 못한 식사를 하자는 연락이 왔다. 그 날 이후 선생님과 나는 종종 만나 식사를 했고, 그 인연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얼마 전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인연을 계속되게 만든 사람이 나였다는 것이다. 꾸준히 연락을 해온 사람은 분명 선생님이었는데.
처음 만난 날, 버스에 오르면서 내가 한 말이었다. “또 봐요.” 정말 또 볼 생각이었던 건 아니었다. 습관처럼 나온 말이라는 것을 알리 없는 선생님은 그 말에 용기를 내어 연락했다고 했다. 전달하려 한 적 없는 무언가가 선생님에게 전달되었고, 한 번으로 그칠 수 있었던 만남은 인연으로 이어졌다. ‘전달 가능한 것은 언제나 전달 불가능성을 안고 있다’고 한다. 역으로 전달하려 한 적이 없어 전달 불가능해 보이는 무언가도 전달 가능성을 안고 있는 듯하다. 전달 오류는 나와 곤라드, 완다와 자말 사이에 우발적 마주침을 발생시켰다. 하지만 찰나의 엇갈림에서 인연을 만들 수 있었던 건 받는 이와 다시 보내는 이의 응답(태도)이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전달 오류, 오배송이 늘 즐거운 상황만을 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잘못 전달 받은 상대가 기쁜 마음으로 나에게 팔을 벌려 다가온다면 그것이 그를 향한 것이 아니었더라도 기꺼이 팔을 벌려 다가가려 한다. 전달 (불)가능성이 발생시키는 순간순간에 충실하며 시무룩해지지 않고 편지를 쓰고 싶다.
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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