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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지수] 학문 장에서의 ‘디스포리아’ II: 계급성 문제와 제도화

최종 수정일: 2022년 2월 18일



대학원 생활을 계속할수록, '계급성' 혹은 ‘계층’ 비슷한 개념에 점점 더 천착하게 된다. 정말, 대학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잘 살았던 사람들이 많다. 혹은 배운 사람의 자식인 경우가 많다. 또 시간이 지날수록, 경제자본, 문화자본을 초기에 부여받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공부를 비교적 쉽게 시작하게 됨을 느낀다. 그것은 아주 미시적인 영역에서의 감각의 차이로부터 드러난다. 예를 들면 사소하게 같이 밥을 먹으러 갈 때 어떤 정돈되어 보이는 취향을 가지고 있는 것, 인테리어를 하거나 소품을 구매할 때 미적 감각이 있는 것, 어떤 사회적 혹은 문화적 이벤트에서 '의례'를 소화할 줄 아는 것, '낄끼빠빠'하여 오롯하게 학업에만 투자할 시간을 확보할 줄 아는 것 등 일상에 대한 감각의 차이부터 시작해서, 공부를 시작할 때 필요한 기술적 플랫폼이나 장치에 대한 이해도 및 접근성의 차이(이것은 후천적으로 경험을 통해 습득되는 경우가 많지만 또 분명히 생득적인 속성이 있으며 초기자본 같은 위치를 갖는 것이다), 학업 성취도에 대한 차이, 실적의 차이, 사회적 관계자본에 대한 인프라의 차이 등등까지 끊임없이 확장된다.


수업에 읽어가야 하는 텍스트를 볼 때마다, 늘 연구 방법 부분에서 항상 등장하는 저자의 자기성찰 시간 - '연구자인 나는 자신의 중산층-백인이라는 계급적이고 인종적인 위치성을 생각하며....' - 을 보고 있노라면, 기이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내가 참여한 어느 수업에서, 교차성의 맥락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분석하는 보고서를 써야 하는 시간이 있었다. 공유용 게시판에 자유롭게 업로드된 각자의 글에서는, 정말이지 모든 사람이 다 '중산층이라는 자기 위치'를 성찰하고 있었다. 중산층이자 퀴어인 자신을, 중산층 자제로서 대안학교 혹은 홈스쿨링을 하며 ‘공교육 외부’에 있었던 자신을, 혹은 중산층이자 여성이고 장애를 앓고 있는 자신을 ......


이것은 수업 구성원이 스스로 자신의 교차성을 감각할 수 있는 극적인 순간이 분명했지만, 어떤 의미로는 ... 공포이기도 했다.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어느 정도 각오와 예상을 했었지만, 진짜로 이럴 줄은 몰랐다. 분명 자신의 ‘계급의식’은 매우 주관적인 진단일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다양한 계급적 배경으로부터 비롯된 자기정체화 과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분명, 있었을 수도 있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그 게시판에 자신에 관련된 이야기를 뺐거나 굳이 공유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계급적 혹은 계층적인 자기성찰은 분명히 연구를 함에 있어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의 말하기, 타자와의 공유, 가시화 단계는 이런 사소한 수업공간에서도 분명한 위계와 검열의 축을 갖는다.


왜 학술 공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계급적으로 균질화되는가. 왜 정말 필요하고 괜찮은 프로그램은 항상 비싸고 비판적 사회과학을 하려면 돈이 많아야 될까. 심지어 어떤 사람이 비판적인 학문하기를 욕망하는 순간조차, 그 비판적인 감각의 배양에조차 선결조건으로서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이 크게 작동하고 있다. 끊임없이 닳아 없어지고 착취되면서도 이 판에서 '존버'를 할 수 있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의 자본을 갖추고 그것을 삶의 감각이라는 차원에서 운용할 줄 아는 사람인 것이다. 그게 아니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유학을 통해 탈조선을 꿈꾸어야만 하는 상황이 된다. 그러나 유학을 준비하려면 또다시 초기자본을 마련해야 하는 딜레마에 놓인다.


(제도적) 지식 장에서의 계급적 차이 혹은 계급적 수렴에 대한 감각은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점점 지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 자리에 왜 내가 있게 되었나라는 존재론적 질문, 자기 궤적에 대한 질문을 할 때마다 늘 돌아오는 배경이 된다. 아직 논문도 안 쓴 과정생이고, 불안정 지식노동자로서 지리한 미래전망을 가지는 이 위치마저, '내겐 너무 과분한 자리'인 것만 같은 인식으로부터 비롯되는 근원적인 디스포리아가 있다. 가끔씩 어디선가 들려오는 '너는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유령 같은 목소리. 모종의 불화. 그로부터 비롯된 고립감은 자기 자신의 공부에 대한 정당성에 수도 없이 질문을 하게 만들고, 주변으로부터의 충분한 네트워크가 없을 경우, 오랫동안 공부에 손을 놓게 만들거나 배워도 배운 게 아닌 유예 상황을 길게 만들기까지 한다. 주기적인 불화 속에서, '무리한 진로 선택을 스스로 한 대가'로 수많은 노동에 대한 필요와 강박이 따라붙으며, 주기적인 번아웃과 소진이 이어진다.


이것은 구조적 차원에서의 문제인 동시에 공부하는 그 자신의 생애과정 내내 계속해서 ‘어떤 불일치에 대한 해명 혹은 합리화와 명령’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학술 장의 구조화된 문제가 갖는 내재적 재생산 효과이기도 한 것이다. 지식인이 더이상 경제적 부유를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반지성주의’의 사회라고도 하지만, 상징자본으로서의 지성의 위치 그리고 대학을 중심으로 한 제도적 학술 장에서 한 방향으로 수렴되는 지식인의 계급적 위치성은 여전히 건재한다.


이런 디스포리아들과 불평등함을 사회적·구조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대학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학술운동에서도 많이 등장한 바 있다. 다시 말해 학문 장의 대학 중심성이나 대학이라는 제도 자체의 폐쇄성에서 독립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야 된다는 것이다. (만약 대학 공간을 제도화된 공간이라고 한정할 경우) ‘제도 바깥에서의 제도화’라는 이러한 제안에는 공감하나, 탈제도화 혹은 비제도화만이 유일한 대안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제도화가 대학 공간에 한정된 것으로 여겨지고 실제로 제도화의 맥락을 한정시킴으로써 그 자체에서 갖게 될 맥락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재생산’이라는 맥락에서 가장 접근성이 높은 곳을 생각할 때 문제는 제도 안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게 된다. '비제도' '탈제도' 혹은 대학 바깥의 힘 자체를 구성하게 하는, 혹은 그것에 접근가능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조건들을 생각해야 한다.


소위 ‘비제도권에서의 문화운동’과 가장 밀접할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비제도권에서 수행되는 지적 기획들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명시적으로는 모든 시민으로 되어있고 개방되어있고 개방되어야 하겠지만, 그것 역시 구성과정에서 특정한 지리적, 문화적 조건들을 수반하고 있다. 왜 대안학교를 나오거나 대안대학을 수료한 학생들이 대안학술공동체에 특히 많을까? 이런 기획들이 전지리적인 맥락에서 모든 곳에 산재할 수는 없고, 없을 수밖에 없다. 지역에서 태어나 부모님께 '학교는 무조건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정규교육과정만을 밟았거나, 혹은 정규교육과정에서도 배제되었던 사람들이 이 세계에서 ‘자기 자원과 전략’으로서 마지막으로 매달릴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과 접근이 무엇일까?


이 비판은 2010년대 초반 고대 ‘김예슬 선언’을 필두로 이루어졌던 탈제도의 담론들과, 그와 관련해 이루어졌던 메타적인 비판들과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 누가 바깥을 상상할 수 있고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가. 바깥을 상상하는 것 역시 특정 국면에서는 특정한 자본을 필요조건으로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문제는 제도를 폐기하는 형태가 아니라, 초분과화 혹은 탈분과화를 명목으로 제도 밖을 무조건 상상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넘어서서 안과 밖 모두에서 고민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고민들은 지식 혹은 연구자 되기에 대한 '역량'이나 '능력'에 대한 질문, 그리고 ‘순수하게 학문적으로 열심히 하기라는게 정말 가능하냐’는 질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게 투명하고 공정하게 가능할 것이라고 보는 것은 환상이다. 물론 각자의 삶에서 목표하는 바 혹은 어떤 윤리에 대한 지향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추구하는 개인적 맥락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일 테다. 그러나 성실함은 명백하게 어떤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여유들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그 여유가 가능했던 기반과 그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수행했던 모종의 자기조정들(돈 벌 일을 줄이거나 알바 제안을 거절하는 것, 수면 시간을 조정하는 것 등등)로부터 나온다.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공부에 성실하고 싶은 삶을 지향할지언정 나는 그것을 전문화된 인간의 중립적인 필요조건으로서 강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지식 장에서의 행위자로서, 특히 권위가 있거나 상대적으로 높은 발언권을 가진 행위자로서, ‘성실함이 필요하다’는 말의 수행 효과를 생각하지 않고 마치 '진정성'의 용례처럼 자꾸 반복하는 사람들을 보면 솔직히 정말, 야속할 지경이다. 자문해보아야 한다: 그 말은 '노오력'의 효과와 얼마나 어떻게 거리를 두고 있으며, 어떤 차별성을 갖는지? 그 범주란 얼마나 투명한지?


능력이나 성실함에 대한 요청은 필히, 그것의 가능한 조건태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져야 한다.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것'의 경제적, 사회적, 관계적 조건에 대한 질문으로 가야만 한다. 결국 지식 장의 구조와 재생산에 대한 질문으로 가야만 한다. 직진을 하건 우회를 하건, 다 같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고 공동의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질문으로 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그런 주장은 상징폭력을 재생산하는 원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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