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커먼즈의 가장자리들'을 주제로 하는 안동대학교 민속학연구소 공동체문화연구 웹진 <공생공락> 제7호(2022.08.31.발행)에 수록된 글입니다. 다음 링크에서 해당 특집에 실린 다양한 글을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요즘, 여러 형태로 ‘커먼즈’와 관련해 만들어지는 기획과 글들을 마주하고 있다. 지금도 과분하게도 해당 기획과 관련되는 청탁을 받아 글을 쓰고 있다. 나는 학교 바깥의 연구자 네트워크나 학술공동체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활동을 해오고 있고, 학술 장 혹은 내가 전공하고 있는 해당 학문 장의 지속을 위해 ‘함께 공부하는 것’의 중요성을 계속해서 강조해왔기 때문에, 학술 장에서의 다양한 커먼즈의 형태와 과제를 고민하는 연구자들과 만날 기회가 이런 형식으로 주어진 것이라 생각한다.
커먼즈의 학술적인 개념과 정의에 대한 구분 및 사례들은 이미 이를 정리한 여러 작업들이 나와있고, 글을 쓰는 본인 스스로가 여전히 이에 과문하다고 판단하기에 여기에서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연구자의 삶’을 구성하는 어떤 속성들과 커먼즈의 개념이 만날 수 있는지, 그것이 현재 대학과 그 바깥의 무수한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학술 장에서 어떠한 의제를 던지는 한편 또다른 난점을 불러일으키는지에 대한 개인적인 단상들을 적어보고자 한다. 이 개념은 사실 (그 필요성에 대해 당위적으로 공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익숙한 가치’이자 매우 유의미한 가치로 느껴지면서도, 아직도 약간의 모호함과 곤혹감을 던져준다. 왜 그렇고, 어떤 부분에서 그런 걸까?
학술 장에서의 ‘커먼즈’ 논의와 학술 네트워크
학술 장 내부에서 ‘커먼즈’에 대한 논의들은 2019년 지식공유연대의 설립과 오픈액세스 출판 운동을 기점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오픈액세스 운동의 목적은 학술지식의 유통이 민간 학술 DB업체의 소유구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환경에 의문을 제기하고, 연구재단의 등재지 평가 제도를 개선하는 동시에 학술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운동은 학술 사회에서 생산되는 지식이 “사회적 협동의 산물인 공동의 부”라는 점에서 커먼즈라는 점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지식사회에서의 ‘(비/제도적) 학술공동체’ 형성의 중요성은 역사적으로도 계속해서 강조되어 왔다. 수십 년 전 독재정권 하의 대학이 위기의 공간으로 지적받을 때부터 이러한 공동체들은 대학을 중심으로 한 ‘제도’가 확보하기 어려운 비판적이고 진보적인 지식을 꾸준히 생산하고 유통해 왔다. 이후 비제도권의 다양한 학술공동체들은 때로는 대항학술운동의 거점으로, 더 나아가면 최근에 이르러서는 대학 바깥에서 자구책을 마련해야 하는 연구자들의 지속적인 연구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플랫폼으로 그 성격과 형태가 다양화되고 있다.
커먼즈로서의 지식에서 중요한 점은 무엇보다도 학술지식이 ‘사적인 소유’가 아니라 공공의 것으로서 공유되고 생산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와 동시에, 커먼즈의 구성과정에는 동시에 ‘커먼즈를 (다시) 사적으로 소유하려는’ 힘과의 부딪침이 존재하며, 이러한 사적 소유로의 부단한 회귀라는 경향은 한국 사회 및 대학의 신자유주의적 변화라는 구조적 문제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등재지 제도와 계량화되고 개별화된 연구업적 평가 시스템, 연구자 개인의 업적을 위한 학회와 학술지 시스템의 ‘수단화’, 각자도생이 강요되는 연구문화들은 현재의 비제도권 연구자 네트워크들이 생겨난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다. 내가 활동하는 연구그룹을 포함하여, 점점 더 제도 내부에서 공부와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지며 연구문화를 형성할 ‘동료를 점차 찾기 어렵다’는 판단 속에서 광의의 연구자들과의 연결을 위한 공동체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공동체들의 활동은 경제적인 진입장벽으로 인해 대학 학위과정에 점차 접근하기 어려워지거나 다양한 학제 사이의 교류가 원활하지 못한 현실을 배경으로 두고 있으며, 이 속에서 연구와 지식을 교류할 수 있는 지속적인 장을 만들어나가기 위해서는 학교 바깥의 활동이 반쯤은 필연적이라는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커먼즈 개념을 통한 연구생태계의 확장
학술공동체들은 여러 가지 활동과 연결을 통해 학교 안팎에서, 학교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연구자 재생산 문제를 해결할 방법들을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커먼즈로서의 지식에 대한 사유와 다양한 형태의 학술공동체는 양자가 모두 대안적인 형태의 지식 생산 및 그 생산의 주체들을 고민한다는 점에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학술 장을 구성하는 지배적인 규범들을 비판적으로 사유하기 위해 공통적으로 함께 만들어낼 수 있는 무언가를 고민하고, 함께 연구하면서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또한 더 이상 지식이 ‘학교에 소속된’ 혹은 ‘특정 분과에 해당하는’ 구성원들에게만 환류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리고 문화연구와 같은 학제적 학문들이 분과적 지식의 경계를 넘어서기 위한 기획 속에 존재하고 세계를 구성하는 자본주의적 질서에 대한 현실적 개입과 실천을 과제로 한다면 나의 학문이 ‘가르쳤던 바’와 커먼즈의 목표는 크게 다르지 않은 차원에 있는 셈이다.
무엇보다, 커먼즈로서의 지식에 대한 인식은 ‘연구자’와 ‘연구생태계’의 확장적 구성이라는 문제로 확대될 수 있다. 지식을 더 이상 연구자의 사적인 소유물이나 성과물이 아닌 공통의 것으로, 공공적인 것으로 생산되는 것으로 감각할 수 있다면, 대학이라는 공간, 심지어 대학 밖을 넘어선 학술 장에서 토론과 세미나에 참여하고 각종 행사를 기획하고 조직하며 참여하는 ‘연구자’의 범위는 법률이 규정하는 ‘(박사)학위취득자’의 영역을 뛰어넘게 된다. 대학과 대학 바깥의 학회, 포럼, 소모임, 세미나, 발표 및 토론회, 강의 프로그램에서 지식 생산의 주체는 그 공간을 꾸리고 그 공간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우리가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보고 듣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생산된다. 지식은 그 과정에 연결된 모든 이들의 공동 생산물이다”.
지식사회는 지식을 생산하고 학술생태계를 순환시키는 이 모든 ‘노동’들, 특히 학술 장을 돌리기 위해 각종 간사나 보조원, 위원 등의 직함 하에 수행되는 “그림자 노동”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커먼즈 개념을 경유한 연구자 정의의 확장은 지식 생산의 주체들이 다양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새로운 주체들을 발굴해 내서 명명하며, 그들이 수행하는 지식활동과 노동이 학술 장에서 본질적으로 요구되었던 역사를 가진 활동임에도 불구하고 암묵지 속의 ‘체험’이나 ‘경험’으로 격하하고 주체들의 위치를 지워버렸던 현재의 학술 장의 구조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만든다.
남아있는 문제들
오픈액세스 운동 관련 논의테이블 및 매뉴얼에서 나에게 가장 흥미롭게 읽혔던 주제는, 사실은 지식의 공공성이라는 문제보다도 ‘저작권료를 학회가 받지 못하게 되면 그 재원을 어디에서 확보하여 운영을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대책에 관련된 논의였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측면에서, 커먼즈로서의 지식 구성을 위해서는 결국 그 과제에 이르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에 대한 현실적인 논의 역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했던 것처럼 당연히 사적 소유와 개별화를 중심으로 치닫는 학계의 시스템에 연구자 사회가 집단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공론화’ 역시 필요할 것이지만, 결국 당장 학술 장의 암묵적 질서 속에서 여러 주체들, 특히 과정생이나 신진 학위소지자를 필두로 배당되는 (주로 저임금 혹은 무불의) 지식노동들과 이에 대한 ‘공정한 보상’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이슈에 대해서, 커먼즈의 입장에서 어떻게 정의하고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냐는 문제 또한 생겨난다고 본다. 인문사회분야를 비롯한 학술 장은 연구자 재생산의 위기로 비롯되는 “학문 절벽의 시대”에 직면해 있다. 연구자의 사회적 연구안전망이 충분히 확보되지 못한 현재의 삶 속에서는 주체들의 ‘어느 정도 각오된 의지’가 아니라면 커먼즈는 고사하고 제도 바깥 네트워크들을 제대로 유지하고 재생산 주체를 확보하는데도 어려움이 따르는 상황이다.
내가 생각하고 주장하고자 하는 학술 장에서의 ‘(지식)노동’들에 대한 명명과 확장적인 정의는 그러한 노동들이 ‘노동’이나 ‘연구자의 연구활동 성과’로조차 승인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문제제기이며, 이에 대해 그것이 경제적인 방식이든 비경제적인 방식이든 정당한 노동 혹은 연구자의 경력으로서 ‘가치화’가 충분히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사적 소유 기반 시스템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커먼즈의 논의는 지식노동에 따르는 이러한 ‘가치(혹은 임금)’의 문제를 ‘자본주의적 노동’으로 간주하며 근원적으로 충돌한다는 인상을 받는다(그래서 종종 이 관점에서의 논의는 무불의 학술활동들을 ‘노동’으로 명명하자는 입장에 대해서도 서로 부딪힌다고 느껴진다).
그렇다면 지식을 ‘공공의 것’으로 만들고 ‘집합적인 것’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어떻게 목표와 과제들의 순서를 정할 수 있을까? 특히 신진연구자들의 생존이나 학업 유지가 불투명한 현 상황 속에서, 지금도 시스템 속에서 견디며 분투하고 있는 더 많은 후속세대 연구자들의 참여를 어떻게 이끌어낼 수 있을까? 당장 그것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노동과 시간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며, 이미 나의 목 언저리까지 들어온 사적 차원의 생존이라는 문제가 ‘집단의 실천의 의지’만으로 쉽게 덮어질 수도 없는 상황에서 ‘공적인 것’을 사유하여야 하는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돌아보며
결론을 내지 못한 질문들을 안고 여러 생각을 정리했지만, 연구자의 삶에서 ‘커먼즈’에 대한 감각이 발생하는 맥락은 이미 구조적으로 예견되어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 연구그룹에서 진행하는 세미나에 새로 참여하면서 ‘이제 더 이상 혼자 공부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왔다’고 말했던 어느 회원의 이야기처럼, 연구자 개개인의 연구환경이 모두 동질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제는 더 이상 혼자서만 각개격파로 살아남기는 더욱 힘들어졌다는 문제의식을, 지속가능한 연구하는 삶을 위해서는 각자도생이 아닌 다른 방식을 모색해야만 한다는 모종의 위기의식들을 여러 곳에서 느낄 수 있다.
연구생태계에서 ‘커먼즈’의 구성은 네트워킹이나 지식공유 플랫폼 개발을 넘어서서 물적인 조건과 공간들(연구자 사회주택, 연구자의 집), 연구자에 대한 법적인 규정과 권리 규정(연구자 권리선언) 등으로 점차 그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제도, 권리운동, 학술연구의 영역 모두에서 이런 논의들이 확장된다면 더 이상 학술영역의 사각지대에 위치한 연구자들이 스스로 끝없는 ‘자기 말하기’를 수행하다 개별적으로 소진되지 않아도 좋은, 자기 말하기가 ‘공통적인 것’인 것으로 지속적으로 전환될 수 있는 자리가 생겨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참고문헌
권범철, “지식 커먼즈와 연구(자)의 삶”, <상허학보>, 60집, 2020.
박서현, "한국 학계에서 지식 커먼즈의 대안적 공유에 대하여: 인문사회계 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사회>, 21집 2호, 2020.
박서현, “학술 커먼즈로서의 학회와 학술지에 대한 검토”, 성신여자대학교 인문도시사업단 2022년 컨퍼런스 발표문, 2022.
정정훈, "비제도권 지식운동의 궤적과 동시대의 지식운동 연구를 위한 시론”, <문화연구> 8권 2호,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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