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 우울-말하기 공간이 알려주는 것들



우울과 정신장애에 대한 관심은 일생에 걸쳐서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감정의 부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청소년기부터 시작해 크고 작은 소진과 우울이 때때로 진행되었다. 특별히 약을 먹어야 할 정도의 병증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느꼈지만 나이가 들수록 한 번 감정이 몰아닥쳐 오면 하던 작업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무기력증으로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긴 시간 홀로 지내는 상황도 생겼다. 이것이 수 개월을 주기로 반복된다. 처음에는 이러한 주기성을 ‘삶의 형식’이라고 생각했고, 우울을 개인화시키는 많은 담론들이 그러한 사고를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있었으므로, 자존감을 어떻게든 스스로 올려서 극복해야 하는 문제라 생각했다. 미디어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울이 마음의 감기’일 정도로 흔한 것이라면 매해 역병처럼 찾아오는 자신만의 질곡들이 있을 것이고 왜 그런지는 몰라도 그것을 관리하면서 버텨 가는 것이 또 삶이라 믿었다.

이러한 끝없는 관리의 삶이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었던지 수년 전부터 개인의 우울을 주제로 다양한 담론들이 구성되기 시작했다. 불안정하고 상처받고 병든 주체들이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다양한 치유문화(healing culture)가 고통의 저변들을 감싸 돌기 시작했다.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에 관한 많은 저서와 강의들이 등장한다. 아파도 괜찮다, 조금은 괴로워해도 된다, 우리 모두 아프다. 아픈 건 부끄러운게 아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것의 원인도 해결도 오롯이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귀결되었다. 아픈 게 부끄러운게 아니라는데도, 고통을 구성하는 언어는 실제로 언제나 진료실 혹은 자신만의 폐쇄된 공간을 통해서만, 아니면 남에게 보여줄 수 있을 정도로 정제된 힐링 에세이의 언어를 빌려서만 발설될 수 있었다. ‘우울의 무게’는 열심히 이야기되기 시작한 만큼 더욱 가벼워지는 것 같았고, 그랬기에 실제 일상세계에서는 더욱 무거워졌다. 자기를 구성하는 아픔의 맥락과 사회적인 요인들은 약료화된 치유 과정 속에서 다른 언어로 변환되거나 삭제되었다.

무엇보다 우울과 통증은 자기가 이제 그것을 잘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 순간 불현듯 찾아왔다. 고통의 주기성이 자기관리의 영역으로도 완벽하게 포섭되지 못하는 것이라면 어찌되었든 일종의 ‘반려’로서 내 삶으로 끌어안고 가야 하는 일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진료실을 벗어나는 순간 우울과 고통은 자신과 연결된 공적/사적 관계들과의 결합 속에서 여전히 비일상의 영역에 위치하며, 언어화되지 못하거나 그 자리에서 다른 형태의 의미로 바뀔 것을 요구받는다. 우울에 대한 담론이 넘쳐나지만 그것의 일상적인 위상은 충분하지 않거나 부재한다. 그러나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주기적으로 우울한가. 무엇이 내 소진과 우울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어떠한 위치성이 나를 교차하고 있는가. 내 욕망은 어디에 있고 나는 치유문화에서 무엇-되기를 요구받고 있는가. 약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나의 질곡과 서사가 있지 않은가. 스스로의 ‘언어화’가 필요하다. 비록 고통을 마주하는 시간에는 온 일상이 전부 잔해가 되어 버리지만 최소한 나의 주기성에 대한 작은 감각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그때부터 우울에 대한 자기 말하기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트위터와 같은 SNS나 웹 커뮤니티를 포함한 온라인 공간에서 ‘우울’에 대한 말하기를 언제나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개인적/공적 속성이 동시에 부여되어 있는 SNS 공간에서 그 말하기의 양상은 강렬한 정동을 유발하는 단어부터 고통에 대한 과거 경험들의 복기와 자기서사, 사회적 문제나 주제와 연결된 타래들에 이를 정도로 다양하다. 그것은 개인 계정으로부터 출발하는 말하기이지만 매체의 속성과 맞물려 특정한 클러스터를 만들면서 집단적인 말하기의 장을 구성해 낸다. 내 경험에 기댄 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집단적 우울 말하기에 대해 보이는 시선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우울의 일상적인 ‘전시’에 대한 불쾌감이고, 둘째는 우울의 ‘전염’과 개인적/사회적 악영향에 대한 공포감이다. 누군가가 보기에 이러한 과정은 ‘정신병이 자랑도 아닌데’(‘우울이 부끄럽지 않은 것’이라는 사회적 인식과 비교해, 장기적 우울장애나 병인으로서의 자기 정체화에 대한 이러한 지배적 인식은 대단히 흥미로운 것이다) 부정적인 자기 감정에 탐닉하고 도취되는 자위행위일 뿐이다. 누군가가 보기에 이것은 전문적 진단을 받지 않고 함부로 자신의 병인을 진단하고 자신의 위치를 합리화하며 서로를 감정의 수렁에 빠뜨리는 시궁창과 같은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이것을 내면적 치유행위와 아픈 자신에게만 집중하게끔 만듦으로써 공적인 것을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개인화된 치유적 문화의 한 단면으로 진단한다. 또 누군가에게 여기는 그저 집단적인 자살 모방과 유행(?)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사회의 ‘관심과 보호와 규제’가 필요한 공간이다.

그러나 온라인 장에서의 우울 말하기는 물리적인 제도와 사회적 관계성의 사각지대에서 언어가 되지 못한 고통들이 모인 정착지이자 상호작용을 통해 자기성찰적 글쓰기가 부분적으로라도 분명히 이루어지는 공간이라는 이중적인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많은 이들이 밝혀낸 것처럼, 정신의학에서의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의 설정은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맥락과 무관하지 않았으며, 이것은 의학 담론의 부상과는 별개로 실제 현실에서의 우울과 정신장애의 위상을 끊임없이 정박해 왔다. 다른 한편으로, 만성통증 환자의 질환서사를 연구한 김향수(2020)가 지적하듯 오랜 기간 이어져 온 물리적, 정신적 통증과 같은 비가시적 질병들은 다양한 경험과 결합되어 그 사람의 생애과정을 통과하며 증명과 인정의 메커니즘으로 질환자 주체의 삶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의학 담론만으로는 완벽하게 포착되지 않는 ‘존재론적 문제’로 부상하게 된다. 특히 우울 말하기에 계급과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의 문제와 결부된 사회적 폭력의 문제가 연결되었을 때, 어떤 우울은 언어화되지도 못한 상태에 있다가 아주 오랜 기간을 지나 사후적으로 명명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말해진 우울이 다른 이들의 경험들과 만났을 때, 사회적인 담론, 혹은 피해자 주체의 언어, 혹은 ‘이제서야’ 부여되고 명명된 의미들과 교차했을 때다.

그러한 차원에서 이러한 우울 말하기는 결국 온갖 것들을 경유하며 자기 삶의 서술자로서 자기 감정과 경험을 정리해보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자기 기억과 자신과 사회 사이의 연결점들을 거슬러 올라가며 복잡한 정동에 빠져들었다 나오기를 반복하는 지난한 탐색 과정이다. 그것은 대부분 자기 자신에 대한 날것의 질문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지만, 집단적으로 말해지는 과정에서 만남의 장소에 서며 다양한 교차점을 만든다. 분명히, 일부 지적들처럼 온라인 장에서의 우울 말하기는 양가적인 에너지를 갖는다. 감정적 위로나 연대가 일어남과 동시에 실제로 부정적인 감정이 전염될 수도 있고 서로의 트리거를 유발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우울 말하기 장은 상대적으로 하위문화의 영역에서 구성되거나 비공개 처리된 공간들을 경유하고 있으며 나름대로의 규칙과 주의 속에서 진하지도 옅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감을 가지고 구성된다. 우울 말하기 공간은 개인의 가장 사적인 것처럼 보이는 언어들이 다른 경험들과 공명하며 공적이고 사회적인 주제들과 만남의 순간을 잠재적으로 갖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의료학적 관점이나 자기계발의 관점으로 포착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에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서 접근 및 해독되어야 하는 공간이다.

말하기와 글쓰기를 통해 취약한 주체로 자신을 인정하는 것에는 어떤 복합적인 의미가 있는가. 더 나아가서, 장기 지속되는 병증과의 생활과 어찌되었든 영위해야 하는 일상의 틈새 사이에서 자기가 자신을 스스로 정신장애인 혹은 질환자로 정체화하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자기 고통과 삶에 대한 언어를 부여하려는 시도들은 어떠한 렌즈와 사건들을 거쳐 ‘전시’나 ‘집단적 모의’ 혹은 ‘미성숙한 집단의 유행문화’ 같은 일면적 의미만을 가지게 되는가. 1-20대 여성의 자살률이나 정신질환 진료 비율이 날로 높아지는 현상을 단순히 ‘코로나 블루’의 문제로만 환원할 수 없으며, 여성주체들이 생을 살아나가며 마주하는 일련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인 어려움들과 연결해야 한다는 분석들이 적지 않게 등장하고 있다. 우울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분명히 사회적인 속성을 갖는다. 그러한 측면에서라도 우울 혹은 병증과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이 삶에 대한 자기 저자로서의 말과 글들을 면밀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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