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 선배의 자세?



‘선배’라는 존재는 사실 박사과정 이후부터는 내게서 거의 사라졌기에, 제목의 내용을 돌려줄 특정 선배는 없다. 흔하지는 않겠지만, 특정한 학교 출신 사람들이 만드는 집약적인 네트워크 모임이나 ‘00 교수님 제자모임’이라는 게 따로 존재하지 않는 분위기의 학습환경에서는 더욱 그러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 같은 학교는 아니더라도 ‘장’의 선배라는 존재들이 생긴다. 선배/후배/1세대/2세대/3세대 기타 등등의 어떤 세대론적 구분에는 분명히 허점과 한계가 존재하며 대표성의 문제도 있다. 그렇다고 ‘먼저 배운 사람들’과 ‘먼저 배운 사람을 참조하며 나중에 배운 사람들’의 구분선이 완전히 무화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이런 용어를 썼다. 언젠가는 먼저 배운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선배라는 위치는 굳이 의식적으로 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너무 의식적으로 점하려 드는건 꼰대의 징후이다).


여하간 대학원생에게도 이러저러한 선배들이 생겨나는 모멘트가 생기는데, 그들이 학회에서 연구실에서 술자리에서, 혹은 이러저러한 다른 만남의 공간에서 들려주는 여러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권위를 대놓고 실은 채 수행되는 말도 있지만, 탈권위를 가장하여 자기 위치를 드러내는 발언도 있고, 책임질 수 없는 잔소리라던가, 적당히 당의정을 입힌 무관심으로 무장된 비즈니스적 태도라던가, 연구자들마다 발화의 방식은 천차만별이다(선배-하기란 참 힘든 것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의 주제는 광의의 선배들의 ‘말’에 대한 것이다.


선배들이 해 주는 말들 중에는, 좋은 것들도 많지만 하필 이제 와서 왜 하는지 모르겠는 말도 있기 마련이다. ‘빨리 논문을 쓰라’는 말이 그런 것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아, 모두가 찔리지 않을까… 나조차 찔린다.) 모두가 부인할 수 없겠지만, 집필에는 시간도 돈도 필요하다는 걸, 과정이 끝나가니 알게 된다. 수료 후 집필 기간에 연구자는 경제적으로도 네트워크적으로도 고립된다. 삶이 최소한으로 경제적,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어야 집필에 집중할 수 있는데도 그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논문 쓰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빚을 내어야 한다는 조언까지 듣는다. 연구자가 빨리 쓸 수 없게 만드는 학계의 구조적인 조건들이나 안전망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고, 집필 기간 동안 그나마 충분치 못한 임금으로 받던 일들과 장을 돌리기 위한 노동들도 줄여야 하는 '계산들'을 고려하지 않고, 그냥 빨리 쓰라는 말만큼이나 무책임한 말이 사실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용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조언이 이 말이다. "빨리 써라. (그 동안의 생존은 네가 알아서 해야겠지만)." 그게 이 뜻이 아니면 무엇일까? 그런 게 정말 조언일까?

학위를 따는 것 자체가 ‘연구자의 순수한 성과와 노력’만으로 될 수 없는데도 / 오직 학위소지자에게만 연구자로서의 시민권을 부여하는 학계 사회의 속성을 고려할 때, 이제 더 이상 빨리 쓰기만 하라는 말은 정말 아무 의미도 없다. 선배 혹은 연장자의 위치를 그런 말로 점하고 싶다면, 최소한 후배가 계속해서 집필의지를 가질 수 있거나 고립되지 않을 수 있는 일자리나 네트워크를 제공하려 노력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런 지적/인적 자원을 공유하려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서 선배라는 위치만 가져가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게 없으니까 그냥 끝까지 가만히 있는 선배(물론 그들은 후배들이 제공하는 무불의 노동들을 절대 거절하지는 않는데, 매우 열심히 고마워하고 미안해하기만 한다는 것이 특징이다)도 화가 나긴 매한가지지만, 그런 고민조차도 하지 않으면서 조언만 하는 선배도 분명히 있었다. '아직 학위도 못 받은 애들인데' 동료로 인정하긴 좀 그렇고, ‘내 학교 사람도 아니니’ 내가 케어해야 될 위치도 아니라는 암묵적인 판정이 들어가 있지만, 연장자/연구자라는 위치에서의 행세는 하고 싶은 마음을 그런 말로 드러내면, 보는 후배는 민망해지고야 만다.


또 하나 동의할 수 없는 선배들의 언어습속 중 하나는, 자신의 경험세계로부터 추동된 ‘학술세계의 진리’ 비슷한 것을 일말의 성찰도 없이 개인화된 연구자의 삶을 체화시키는 형태로 의미화하려 드는 것이다(일례로는, ‘연구자는 엉덩이가 무거워야 돼, 세븐 투 일레븐이어야 해’ 등이 있다. 이런 종류의 조언에는 노동자로서의 학생/연구자의 삶이 완전히 삭제되어 있다). 지금의 시스템에서의 성과가 연구자의 실제 가치이자 성과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 과정 동안에 발생하는 무수한 차이들을 무화시키는 발화들이 ‘조언’으로서 존재한다.


그렇지만 연구안전망과 학술세계의 가치/진리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엄밀한 고려 없이, 후자에 근접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판단하고 그게 이것이니 저것이니 운운하는 것만큼 편협하고 성의없는 짓이 있을까. 그런 선배들의 말을 통해 나는 전문화된 인간의 ‘말버릇’이 어떻게 형성되어가는지를 본다. 선배는 분명히 일반이 아닌 특수한 개인일 뿐이지만, 항상 누군가의 거울이 될 수 있는 개인이다. 그럼에도 선배라는 위치는 자기 위치의 효과를 깊게 생각하지 않고 말하기 너무나도 간편한 자리가 아닌가?


학교나 제도도 이 문제에 대해 영역주의 프레임을 은연중에 발휘하며 눈감고 있는데, 그 속에서(바깥이 아니고 ‘속’이다, 부르디외가 나한테 가르쳐준 게 다른 게 아니라 바로 그것이었다) 철저하게 개별화된 질서를 습득하며 자라난 연구자 개인들에게서 그런 발화가 무맥락적으로 수행되는건, 총체적인 '성찰성'의 결여 효과가 아니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연구자의 소양’이라던가 ‘이 바닥의 진리’ 비슷한 것이 그런 양식을 입고 발화될 때마다 종종, (듀 선생님이 웹툰에서 알밤을 콩 먹이는 장면을 상상하며), 묻고 싶어질 때도 있다. ‘님… 말하기 전에 이것저것 충분히 생각했나요?’


당신이 사실 그런 말들을 통해 해주고 싶은 선의의 말이 무엇이었나. 애정을 가지고 해석해보자면 이런 것일지 모른다. 선배였던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결과, 논문을 늦게 쓰고, 등재지 수록 대신 다른 작업들에 시간을 보내고, 박사논문 주제를 ‘요즘 시류에 맞지 않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으로 결정했다가, 고통을 겪었으니까. 새로 공부를 시작하는 후배들은 그런 어려움을 겪지 않기를 바라니까.


그런데 그런 마음을 후배들은 이미 어느 정도 안다. 굳이 반복해서 말하지 않아도 그들이 일상적으로 만나는 세계가 이미 그런 식으로 끊임없이 구성되어 왔다. 반복하지만 더 이상 그런 말만 하는건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 다음의 말들과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해야 한다. 완벽하게 좋은 대안 같은 게 마뜩하게 떠오르지는 않지만, ‘정당하게 자기 관심사를 말할 수 있고 그 말이 충분히 존중받는 자리’나, ‘평소에 만나고 싶었던 연구자들과 판을 자유롭게 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 그런 종류의 하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내게도 좋은 ‘선배’들이 있다. 자신이 가진 인적, 사회적, 경제적인 자원들을 어떻게든 나누어주려 하고, ‘전략적으로 내가 가진 네트워크를 이용하라’고 직접 말해주는 사람들이. 가끔 비용을 드리지 못하고 부탁하는 일도 마다 않고 받아주는, 자괴감이 가득한 채 페이퍼를 제출한 발표자에게 ‘우쭈쭈’도 ‘무시’도 아닌 자기만의 방식으로 열정적인 조언과 토론을 아끼지 않는, 소중하고 신뢰하는 사람들이. 수직적인 조직문화 속에서 가용가능한 자원이나 유닛, 혹은 ‘00교수의 아웃풋’ 정도로 판단되던 때와는 다른 새로운 관계들이 분명히 있다.


내가 어떤 선배들의 말을 싫어하면서도 선배들과 수평적인 교류를 꿈꾸고 동시에 ‘선배’의 존재를 갈망하는 데엔 이러한 연유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생애경로의 참조점을 주기도 하고, ‘언젠가 나도 경력을 쌓는다면 꼭 새로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이런 자세로 대해야지’, 거울처럼 삶의 한켠에 지워지지 않는 다짐을 주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언젠가 모두 선배가 된다. 학술 장의 동료이자 선배 말이다. 그 때의 좋은 자세와 윤리들을 늘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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