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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 동료들에게 ‘귀를 기울이기’



봄철이 되니 학교 안팎의 동료들이 여러 발표를 한다. 논문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은 프로포절과 아이디어 관련 발표를 하고, 지난 겨울에 졸업한 사람들의 논문 발표회도 생겨난다. 오랜만에 동료들의 작업을 보고 들으러 다니면서 간만에 숨통이 트이고 자극을 받는 것 같은 즐거움을 느꼈다. 여러 맥락이 있을 것이다. 박사수료를 한 직후 바깥 바람을 쐬지 못하며 생긴 지적/네트워크적 고립감이 해소되는 느낌도 있었을 것이고(이런 문제는 언젠가 수료생의 비애를 다루는 칼럼에서 이야기할 예정이다...) 막막한 작업들을 앞둔 상황에서 일단 다 미루어 놓고 남의 작업을 보는 즐거움(?)이 커진 이유도 있을 것이고. ‘연구에 대한 연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입장에서 동세대의 다른 연구자들이 어떤 연구를 하는지 관심을 갖게 된 경위도 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비로소 수료 기간이 되어서야, 그리고 일거리와 노동수입이 없는 보릿고개의 상황이 되고 나서야 타인들의 작업에 관심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역설적인 상황이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내가 얼마나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동료들의 작업에 귀를 기울이려 했던가? 제대로 그럴 수는 있었던가? 생업과 자괴감에 밀려 당장 읽어야 할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조차 힘들었던 기억들만 있다. 게다가 대학원에 들어가고 나서 연구관심사가 세분화되고 논문으로 하고 싶은 주제가 정해질수록, 다른 관심사를 공부하는 동료들의 작업과 논의에 현실적으로 집중하기가 어려워진다. 우리는 ‘대학원생에게 학술네트워크와 교류가 필요하다’고 늘 동의하고 있으면서도, 의외로 서로의 글을 잘 읽지 못하고, 서로의 관심사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지 못하며, 각자의 삶을 유지하고 감당하기 바쁘다. 대학뿐 아니라 바깥에서 구성된 공동체에서도 많은 구성원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문제다. 개인화된 연구문화와 더불어 자기 작업을 위해 집중하고 진행해야 할 태스크들, 그리고 생계를 위해 숱하게 기다리고 있는 여타의 노동들이 계속해서 우리를 분리시키고야 만다. 그렇게 해서 남는 공동체란 ‘나는 네가 뭘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를 응원해’라는, 학술성이 탈각되고 오직 정서만 남은 ‘가족적 공동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물론 이러한 공동체가 구성될 수밖에 없는 상황과 나름의 의미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조금 전환해 보면, 이런 현실적인 맥락의 문제들은 종종 공부와 연구에 대한 어떤 ‘태도’의 구성으로도 이어지는 것 같다. 첫째는 ‘선택과 집중’에 따른 전문화라는 환상이다. 간혹 대학원을 들어와서 한 가지 관심사나 이론에 꽂힐수록, 혹은 학위과정을 지나면서 연구관심사가 확고해질수록, 수업에서 모든 것을 한 가지 관심사로 환원시켜서 이야기하거나, 자신이 ‘픽’한 주제나 문제의식이 아닌 연구나 이론에 대해서는 일절의 논의를 하지 않으려는 경향들을 만난다. 그것은 내가 잘 모르는 주제에는 함부로 코멘트를 하기 어렵다는 어떤 겸허함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겠고, 학제에서 가르치는 모든 논의와 이론을 주의깊게 섭렵하기 어려운 현실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이런 과정을 정당화한 끝에 그런 방식의 선택과 집중이 ‘내가 한 분야로 전문화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모종의 인식이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할 필요는 있다.



하나의 관심사에 뾰족해질수록 오히려 다른 것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고민해야 한다. 선택과 집중에 따라 한 가지 경향만을 공부하고 작업하고, 선택과 집중에 따라 관심분야 관련 연구자들과만 함께 교류한 끝에 종종 마주치는 생각은 ‘아, 다시 공부해야겠다, 이것만 보는게 아니었는데’라는 후회와 어느 순간 편협해졌다고 느끼는 나의 학문적 시야다. 어느 선배는 그렇게 학위논문을 따고 졸업한 사람도 결국 제대로 활동하기 전에 다시 스터디하고 공부하는데 수 년을 쓰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는 엄청나게 다양한 연구관심사를 다양한 접근과 지적 자원을 통해서 공부하는 학제적 프로그램 속에서 공부할수록 더 쉽게 마주하게 되는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모든 관심사를 섭렵하는 궁극의 ‘전방위 플레이어’가 되기는 어렵더라도, 언제라도 여러 학제들의 관계 속에서 내 주제를 열어두고 공부해야 함을 느끼게 된다.



두 번째는 연구관심사에 대한 강박이다. 지난 칼럼(#)에서도 나왔듯, 많은 대학원생의 수업과 만남의 장에서 ‘연구관심사’에 대한 질문은 마치 연구자의 신원 확인을 위한 필수적인 의례처럼 기능하고, (그게 종종 불건강한 방식으로 작동할 때) 인간에 대한 리트머스지처럼 작동하는 것을 본다. 학위과정이 올라갈수록 이는 특정 주제에 대해 전문화되어야 하고 충분히 성과를 내어야 한다는 부담으로 작동하며 계속해서 타인과의 비교 속에 나를 몰아넣는 정신적 압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아직 연구관심사를 결정하지 못했거나 ‘꽂힌 주제’가 없는 연구자들은 그때마다 늘 조급함과 막막한 위기의식을 갖게 된다. 난 그냥 더 공부하는게 좋아서 대학원에 온 것이고, 애초에 공부하는 삶 자체를 유지하고 감당하기도 힘든데, 연구자로서 살아가려면 한 주제에 대해서만큼은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고 하니, 아직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것 같다는 의식, 끊임없이 대학의 교육과정이 요구하는 규범에서 내가 분리되는 것 같다는 디스포리아 말이다.



경력을 충분히 쌓아온 연구자가 어느 순간부터 자기 문제의식을 발전시키지 못하거나 공부를 안 하면 문제가 될 수는 있겠으나, 문제의식을 형성하는 과정 중에 있는 연구자들이 빨리 자기 관심사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거나, 한 주제를 처음부터 파 온 연구자를 특별히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의 연구관심사와 내가 현재 생각하고 있는 학위논문 주제는 박사과정 1-2년 동안엔 전환과 공백기에 있었고 3년차 마지막에 ‘나는 어떤 삶을 살아왔고, 내 삶에 대한 불화감의 원인이 뭐고, 내가 집착하고 있는게 뭔지’ 질문을 반복한 끝에 왔다. 칼럼들이 충분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그 계기들은 (당장 영 마뜩찮아 보이는 주제이지만 일단 과제니까 해보게 될) 텀페이퍼 작성 과정이나, 일상을 영위하는 다양한 과정들 속에서 조우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이른 시기에 특정한 관심사를 구성하고, 그게 나의 ‘전문분야’라고 확신하는 연구자들이야말로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게 이거였는지’ ‘내가 놓치고 있는 시야는 없는지’ ‘나의 관심사는 나의 어느 궤적과 연결되어 있고, 전반적인 인문사회과학의 여러 자원과 문제의식의 지형 아래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매핑과 관계성에 대한 질문을 계속해서 던져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타인의 연구관심사나 작업에 대해 관심을 적게 기울이는 문제, ‘선택과 집중’ (내지는 환원)이 자기 주제나 연구소양을 발전시키는 전략으로 이어진다는 어떤 믿음, ‘빨리 내 연구주제를 찾아야 한다’는 압박적인 시간 감각 등은 일정 부분 학술사회에 구조적인 문제와 특성들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문제들이 늘 불완전하게 마무리되는 이유는, 연구자의 학위취득이 학술사회의 기본적 성원권이자 대학원이라는 교육기관의 우선적 목적으로 부여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서 인문사회과학을 전공한 과정/수료생으로서 다른 생활을 영위하며 연구활동을 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지도교원에게도 대학원생 당사자들에게도 어떻게든 빨리 졸업해야 한다는 강박이 계속해서 작동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대학원 안에서 한 명의 연구자를 형성하고 영글게 할 수 있는 이 ‘지적 여정’은 보다 충분한 체계와 시간을 가지고 이루어질 수 있었을지 모른다. 교육의 목적이 전치된 상황에서 우리는 ‘하고 싶은 연구와 공부는 졸업 이후에 하라’는 적극적인 지도 아래 지적 여정을 포기하거나 지연시키며 빠르게 논문을 써 나가지만, 많은 신진연구자들이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졸업 후에 하고 싶은 연구를 하는 순간은 결코 제대로 오지 않는다.



연초에 나는 다정함에 대한 다양한 글들을 읽고(#/##), ‘올해는 더욱 다정해지자’는 목표를 세웠었다. 그 다정함이란 단순한 무비판적 응원과 지지만은 아니며, 그만큼 상대의 생각과 느낌을 더 궁금해하고 관심을 가지고 헤아리고 싶은 마음, 상대와 더 의견을 견주어 보고 토론하고 말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닿아 있다. 즉 당신의 삶과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지적 여정’에 대한 관심이다. 무언가를 읽을 때 ‘상대 논리의 강점과 허점을 파악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포커스보다, 이 사람이 어떤 역사적/사회적 맥락과 어떤 상황들 속에서 무슨 고민을 하면서 이런 글을 쓰게 되었고, 여기에 꽂힌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마치 나에게 관계라는게 그러했듯이 그에게 항상 고민이 되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를 따라가면서 읽는 편이(그리고 그 궤적들과 나의 해석과 궤적들을 함께 대보고 맞추어 보는 것이), 어떤 작품이나 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어디까지나 소소한 바람이며 또 금새 불안정함의 파도 속에 휩쓸리겠지만, 이제 나는 내 작업을 해 나가는 만큼 저작들에 대해서도, 동료들에 대해서도 그런 독법들을 천천히 수행해 보고 싶다. 이제서야 제한적이나마 주어진 기회를 조용하게 써 보겠다. 이것이 막막함 속에서 고립된 수료 기간을 ‘이용’해 보려는 계획들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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