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 '겪어봐서 안다는 것'의 위험함: "매몰되지 않으면서" 경험을 존중하는 법


‘경험’을 어떻게 구성하고 사유할 것인지의 문제는 소외의 경험과 그 경험이 주는 감각으로부터 정치적인 것을 사유하는 모든 학문과 운동에 해당되는 과제일 것이다. 퀴어와 페미니즘, 그리고 모든 타자들과 관련한 문제들과 논의 역시 역사적으로 승인되지 못한 경험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투쟁이다. 나(혹은 우리라고 생각되는 집단)의 경험만큼 직관적이고 빠르게 감정과 감각을 전달하면서, 우리를 순식간에 문제 속에 위치짓는 강렬한 매개가 또 있을까?

그러나 동시에 어떠한 난관이 떠오르게 된다: 우리는 폭력과 타자에 대해 사유하고 고민하면서, 무엇이 과연 경험에 대한 윤리적인 태도일지 고민에 빠진다. 종종, 경험은 발화된 순간부터 일종의 ‘하이패스 입장권’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승인되지 못했던 경험이라면 더욱 그렇고, 특정한 ‘피해’의 경험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의 꼰대스러움을 쉽게 냉소하면서, 동시에 “겪어보지 못했으면 말할 권리가 없다”고 단호히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본질화된 경험에 대해 재고해 보아야겠다. 경험은 당사자에게 논란의 여지가 없는 자명한 것이며, 사유할 필요가 없는 ‘증거’인가? 겪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것에 대한 발언권을 부여하는 것인가? 나아가 한 집단의 공통적인 경험이라는 것은 그토록 동일한 것일까? ‘겪는다’는 건, ‘이미 안다’는 것일까?

경험은 도처에 널려 있다가, 특정한 ‘사용’을 통해 일종의 정치적 경험으로 구성되고, 가시화되며, 자본화될 수 있다. 사회적 소수자들의 경험들이 승인되지 못한 것으로서 추방된 배경에는 역사를 구성하는 ‘승인된 경험’들이 모여 체계화된 지식의 작동이 있다. 경험은 나의 물질적이고 문화적인 베이스와 엮어 구성되면서, 동시에 세계의 상징적 질서를 가로지르면서 현상된다. 이는 경험이 본질 자체라기보다는 철저하게 해석적이고 정치적인 것이며, 당대의 담론이나 가치체계가 정적이든 부적이든 반영되어 있는 영역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개별 주체들의 경험 자체는 일종의 정치들(억압이든, 억압된 것의 폭로이든)을 위한 전략적인 자원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 경험을 절대적인 자명성의 막에서 벗겨내어 이러한 전략적 장에 놓고 정치화, 역사화라는 맥락에서 생각하는 것은 경험 자체의 다양하고 다각적인 구성과 실천들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문제는 경험이 정치화, 역사화되는 순간 선택적으로 무언가를 가시화하거나 비가시화하는 정치적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정체성 정치가 비판받던 맥락 중의 하나도 그 일부가 경험의 본질화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러한 강화의 극단적인 양태 중 하나는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본질화된 경험을 생물학적 몸이나 특정한 사회제도와 단단하게 유착시켜 종래는 치환해 버린 담론들일 것이다(“자궁이 없는 자는 함부로 말하지 말라”, “기혼한 여성은 페미가 아니고 흉자다”). 동일한 방식으로 구성된 정치화된 경험을 우리는 다른 성격의 담론들 – 무슬림이나 이주노동자에 대한 배제, ‘안전 사회’에서 위험분자로 규정되는 모든 존재들에 대한 배제 등 - 속에서 살펴볼 수 있다. 경험이 정치와 인식론으로서 기능하는 맥락을 분석했던 젠더사학자 조앤 스콧은, 이처럼 경험이 구성된 맥락을 보지 않고 경험 자체가 증거화되었을 때 차이의 구성 맥락과 작동 매개에 대한 분석이 불가능해지며 오직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의 재생산만이 반복된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관심의 포커스는 경험 그 자체라기보다는 이러한 경험의 다기한 구성조건에 관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살면서 마주하는 타인의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화해야 할까라는 좀더 실제적인 고민이 생겨나게 된다. 타인의 경험이 나의 인식체계에 들어오지 않던 새로운 것일 때, 혹은 내가 감히 예상할 수 없는 고통일 때, 그리고 그의 경험이 나로서는 인지하기도 어렵고 생각하기 복잡한 성역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타자의 경험들에 ‘전략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하게 된다. 많은 이들이 고민하는 지점이 ‘판단 중지’에 대한 강렬한 충동이다(‘저는 겪어보지 않아서 말할 자격이 없기에 그냥 어떤 판단도 그만두고 존중하겠습니다’). 이러한 태도가 기실 윤리의 외피를 두른 채 대화가능성을 차단시키는 자세라는 것은 이미 많은 이들이 파악하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 이러한 태도는 경험에 대한 이차적 언어화나 해석이 빚을 문제를 고민한 끝에 나온 차선적인 방침일 수도 있다(예를 들면, 내가 언급하는 모든 것이 결국 그것에 대한 ‘재현’이 될 것이라는 고민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런 식의 결론은 절대 해답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이는 결국 경험을 본질화시키는 담론과 언어들이 이끌어낸 부인할 수 없는 결과이기도 함을 알아야 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아무리 경험이 사회적 산물이며 경험의 물신화나 본질화가 문제임을 알더라도, 이를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고 분석하며 해체하는 것은 어쩌면 현실적인 상황에서는 환상일지 모른다. 고통의 전략적인 전시와 성역화만큼이나 반감이 드는 것은 ‘고통을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다’는 믿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스콧에 대해 어느 학자가 제기한 반론처럼, 경험이 사회적 산물이며 이 경험에 많은 제도와 담론, 장치들의 영향이 결합된 것이라 해도 우리가 현실에서 그런 경험을 ‘하고’ 그것을 토대로 고민하는 존재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즉, 이제부터는 경험들의 장에 위치한 플레이어로서, 경험에 대한 윤리적 고민과, 경험의 본질성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경험을 존중하기 위한 고민들이 필요하다. 이것은 공동체의 구성이라는 문제와도 연결될 수 있는 고민이 된다. 상징적 질서를 통해서 인식하거나 말할 수밖에 없지만 상징폭력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만드는 것. 경험을 말하는 주체들과 어떠한 방식으로 적절한 언어와 재현을 구성해야 하는지 정치한 형태의 고민을 유지하는 것. 어렵고 때로는 그것이 폭력이 되기도 하겠지만,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또 다른 형태의 경험, 어쩌면 정말 ‘보편적 경험’ 내지는 ‘공통경험’이라고 불릴 만한 것들을 구성해 나가는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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