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형] 유튜브 비평 8-'신문연칼럼이 하필이면 완전 핫한 #참교육 밈을 다뤘을 때 생기는 일'

최종 수정일: 2월 26일



'참교육’. 근래 유튜브 썸네일을 장식하고 있는 가장 핫한 밈 중 하나다. 쓰임새도 광범위하다. ‘영화 리뷰 채널'들은 덴절 워싱턴 주연의 <이퀼라이저>, 원빈의 <아저씨> 등 영화를 ‘XXX들이 하필이면 은퇴하고 조용히 살던 특수부대 출신을 건드릴 때 생기는 일' 등의 썸네일로 다룬다. 이런 영화들은 네이비씰, 북파공작부대 등 특수부대 최정예 출신으로 은퇴 후 은둔하던 ‘고수’들이, 멋모르고 그들을 자극한 악당을 참교육하는 서사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서사를 압축적으로 다루는 유튜브 영상들은 수십만에서 수백만 조회수는 우습게 기록하며 꾸준히 재생산되고 있다.


‘격투기 채널'들은 더 뜨겁다. 명현만, 정찬성, 유우성 등의 전현직 격투기 선수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참교육 밈과 격투기를 유튜브 콘텐츠에 녹여내고 있다. 가장 ‘순한 맛'인 콘텐츠는 ‘도장깨기'다. 유튜버들이 운영하는 격투기 체육관에 ‘한 때 싸움 좀 했다는' 도전자들이 찾아와 유튜버들과 한 판 승부를 겨룬다. 겸손한 태도를 견지하며 ‘한 수 가르침을 청하는' 도전자들도 있는 반면, 건방지고 자신만만한 태도로 격투기 선수를 ‘부숴버리겠다'고 호언하는 도전자들도 적지 않다. 거의 모든 영상에서 대결의 승자는 격투기 선수다. 그들은 도전자의 패기에 짐짓 놀라기도 하지만, 결국 기술과 체력의 압도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도전자들을 참교육 한다. 시청자들은 ‘겸손한’ 도전자에게는 찬사를 보내지만, ‘까불던' 도전자는 가혹하게 비난하고 조롱한다.


정찬성의 <좀비트립> 시리즈는 ‘도장깨기'에서 한 발 더 나간다. ‘코리안 좀비'라 불리며 UFC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평가받는 정찬성은 코미디언 안일권, 전 농구선수 하승진과 함께 인천, 수유리, 대전 등을 찾아다니며 ‘싸움 좀 했다는' 도전자들을 만난다. 전과 20범, 인천 웅진코웨이 등 화려한(?) 수식을 달고 등장한 도전자들은 시종일관 출연자들을 도발하다가 곧 격투기 선수(박문호)와의 스파링을 통해 참교육을 당한다. 또 한국 헤비급 격투기의 최강자 중 하나인 명현만은 ‘중고차 허위딜러'를 혼쭐내주는 콘텐츠를 통해 ‘참교육 콘텐츠’를 한 번 더 변주한다. 여기서는 스파링 등의 ‘격투’가 벌어지지는 않지만, 신장이 190cm가 넘는 명현만이 피해자와 중고차 전문가 등을 대동하고 허위딜러의 영업장 등을 방문해 위압감으로 그들을 참교육하고 ‘사기’에 가까운 피해 사례들을 교정한다.


시청자들이 ‘참교육 콘텐츠'에 환호하는 지점은 다음과 같다. 참교육의 대상은 법의 제어가 닿지 않는 곳에서 ‘악행'을 벌이는 자들이다. 경찰을 매수해 갖은 악행을 일삼는 영화 속 ‘범죄조직', ‘촉법소년'이라 불리는 ‘일진’, 관련법을 교묘하게 악용하는 ‘허위딜러', 폭행 전과가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번화가에서 싸움을 벌이는 ‘분조장 파이터’들까지. 이들의 악행에 맞서 ‘참교육자'들은 압도적인 신체 능력과 전문성을 발휘해 법의 바깥에 있는 자들을 굴복시킨다. 결국 법의 공백을 메워주는 참교육자의 역할 수행에 의해 ‘안전하고 온전한 사회’가 달성된다.


그러나 개운치는 않다. 지젝이 라캉을 따라 적절하게 지적했 듯, 우리는 ‘총체적 사회의 불가능성’이라는 불가피한 실재를 직면하고 싶어하지 않는 존재들이다. 불가능성은 안락한 일관성을 파괴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완전히 관리되는 법치국가, 모두가 행복해지는 자유 시장이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데올로기적/환상적으로 그 불가능성을 우리 시야 바깥으로 치워버린다. 그리고선 총체적인 사회가 달성된 양 믿어버리고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실재의 흔적이 우발적으로 튀어나온다. 법으로 도저히 관리되지 않는 촉법소년들, 자유 시장 경제에 의해 사회 바깥으로 몰아붙여지는 프레카리아트들. 지젝은 이를 ‘증상’이라고 부른다. 증상은 “사회적 네트워크에 포함불가능한 얼룩”(Zizek, 1989/2013)이다. 그렇다면 법률로서 온전하게 관리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현대사회에서, 법을 피해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은 일종의 증상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증상들을 네트워크 바깥으로 밀어내는 방식으로 다룬다. 그리고 그것이 말소되기까지를 바란다. 그러므로 참교육은 사회 네트워크 바깥으로 밀쳐진 증상으로서의 악당들을 말소해주는 탁월한 기능을 하고 있는 셈이다. 동시에 우리에게 총체적이고 일관적인 사회를 되돌려준다. 열광치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증상은 소멸되지 않는다. 오히려 증상이 있기에 우리의 일관성이 달성되는 까닭이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누군가, 혹은 특정 집단을 소환하는 동시에 사회 바깥으로 밀어내면서 우리의 일관성을 달성한다. 일진과 조폭을 통해 법치 국가와 모범적 시민들이 조화하는 사회를, 이민자 혐오를 통해 안전한 경제 공동체를, 유대인 혐오를 통해 우수한 독일 민족의 통합 사회를. 물론 일진과 조폭은 유대인이나 이민자차럼 소수자 혐오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가해자에 가까운 존재라 하겠다. 그러나 지젝은 심지어 유대주의가 유대인이 실제로 악행을 저지른데서 비롯된다 하더라도, 특정 집단을 악마화하는 방식으로 사회 통합을 달성하려 한다는 점에 여전히 그 혐의가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는 다음과 같다. 일진과 촉법소년, 양아치 등을 소환하고 참교육함으로써 우리가 이데올로기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사회란 어떤 것인가? 학교와 길거리에서 누군가가 누군가를 가해하도록 만든 사회의 체계를 비가시화하면서, 가해자들을 참교육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거라는 믿음이 작동하는 것은 아닌가? 참교육은 구조에 가닿지 못하며 증상은 언제나 돌아온다. 일진과 촉법소년, 양아치들이 사회 바깥에서 등장하여 점차 사회를 좀먹게 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사회 체계의 내재적 속성임을 인식해야 한다. 지젝의 말처럼 우리는 환상을 횡단하고/벗겨내고 증상을 마주해야 한다.



참고문헌 :


슬라보예 지젝, (1989/2013),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새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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