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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준형] 유튜브 비평 11: 찌질함의 재현


‘찌질하다'는 건 과연 뭘까? 보잘 것 없고 변변하지 못하다'는 뜻을 가진 순한글 ‘지질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국립국어원 신어 자료집에는 ‘찌질이'가 ‘다른 사람과 잘 어울려 놀지 못하는 아이’라는 뜻으로 수록되었다고 한다. 종합하자면 근래에 ‘찌질하다'는 표현은 뭔가 집단에 어울리지 못하고 주변부에서 멤돌거나 ‘남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만드는 사람들을 가리켜왔다. 그리고 여러 의미로 널리 쓰여왔던 이 표현은 웹툰 <찌질의 역사>의 인기몰이를 기점으로 특정한 맥락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웹툰의 서사는 좌충우돌하며 ‘흑역사'를 만들어내는 남성 주인공의 과거(특히 이성애적 연애 관계에서)와 성장(혹은 사회화 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주인공 서민기는 애인들을 첫사랑과 비교하고, 애인과의 섹슈얼한 분위기가 고조된 순간 “내가 처음이냐”고 물으며 주변과 독자들마저 당황하게 만든다.


<찌질의 역사>가 재현한 ‘찌질함'은 대중으로 하여금 이 단어를 ‘젊은 남성(특히 20대)의 서투르고 자기 중심적인 연애 행위' 전반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가장 ‘핫한 찌질함’들은 유튜브를 통해 유통되고 있다. 두 유튜버가 그 중심에 있는데, <곽튜브>의 곽튜브(곽준빈)와 <빠더너스> 문상훈이 그들이다. <곽튜브>는 여행 콘텐츠 위주의 채널이지만, 유튜버 곽튜브는 ‘찌질한 이성애자 남성’의 사실주의적 버전으로 여타 플랫폼에서 인기를 얻었다. 작은 호의에도 사랑의 감정을 쉽게 느끼거나, 연애 상대의 과거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준빈아 그건 좀…”으로 표상되는 시청자들의 탄식을 자아내면서도 컬트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빠더너스>의 문상훈은 학원강사, 군인, 복학생, 아이돌, 기자를 넘나드는 가상 캐릭터들을 선보였는데, 특히 군인과 복학생으로 이어지는 ‘vlog’ 시리즈에서 주변 여성들에게 ‘허세’를 부리고 연애에 있어서도 실수연발인 문상훈 캐릭터로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찌질함은 그리 유쾌한 종류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찌질의 역사>와 <곽튜브>, <빠더너스>를 보는 대중들은 댓글로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감정들을 느꼈다는 소회를 밝히곤 한다. 이 콘텐츠들로 인해 대중 스스로가 경험했던 찌질함의 역사들과 ‘이불킥'했던 순간들이 스쳐지나가며 그들을 몸서리치게 만들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이처럼 재현되는 찌질함이 소환해내는 각자의 기억과 일종의 불쾌감에도 불구하고 대중이 이러한 캐릭터들에게 호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누군가의 ‘찌질함’에 대해 고찰해보자. 누군가의 찌질함은 그가 가진 사회・경제・문화적 자본이 적고, 그로 인한 자존감의 수준이 낮을 때 표출된다. 이때 찌질함에 대한 경험은 세대적이고 계급적인 경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젊은 세대이거나 하위 계급일수록 전반적인 자본을 적게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중들이 표출하고 감각하는 찌질함이란, 자본을 적게 가진 사람들이 특정 상황에서 정서적인 한계 지점에 다다랐을 때 발산하는 감정과 행위에 대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연애 상황은 개별 주체가 가진 자본의 전반적인 투여를 요구하므로 이 찌질함이 표출되기가 가장 쉬운 상황 중 하나이다. 따라서 <찌질의 역사>부터 <곽튜브>와 <빠더너스>로 이어지는 재현물 속에서 찌질함들을 발견해내는 대중들의 심상은, 단순히 ‘서툴렀던 과거의 나’ 대한 회상을 넘어서는, 자본을 적게 가진 주체로서 경험했던 사회적 압박감과 ‘아찔함’에 대한 공감인 셈이다.


그러나 찌질함에는 대상이 있다. 찌질함은 특정한 누군가를 향한다. 구조적인 원인에 기인한 찌질함은, 또 한번 구조적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낸다. 이를테면 적은 자본을 가진 남성 주체가 궁지에 몰려 발산하는 찌질함이 그 주변의 여성 주체에게 폭력적인 형태로 발현되거나, 회사에서 핍박받은 노동자 주체의 찌질함이 그와 일하는 비정규직 동료에게 가시 돋힌 말로 나타난다. 아마 누군가의 찌질함에 대한 기억은, 동시에 그 찌질함이 상처 입힌 자들에 대한 기억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찌질함의 재현에 대한 공감은 ‘안전한’ 공감인 것처럼 보인다. 찌질함을 재현하는 콘텐츠들은 찌질한 캐릭터들을 통해 대중 주체가 가지고 있는 찌질함의 경험을 타자화시킴으로써 정서적인 안도감을 제공한다. 나의 아찔했던 찌질함의 경험은 그 자체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곽튜브와 문상훈을 통해 환상적인 방식으로 제시된다. 그들은 스스로의 경험 대한 불편한 성찰을 피하면서도, 곽튜브와 문상훈의 찌질함에 동감함으로써 찌질했던 과거에 대한 감정적 응어리를 해소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때 <곽튜브>와 <빠더너스>는 찌질함을 그들의 재현물 속에서 다시 한 번 덜 불편한 것으로 가공해내며 대중들에게 안도감을 준다. 곽튜브가 보여주는 연애 상황에서의 ‘망상’과 자기 비하는, 학교 폭력 등 어려운 시간을 경험한 그가, 연애라는 사회적 경험에 대면하여 벌이는 ‘기특한’ 분투이자 극복의 서사로 여겨진다. 동시에 그가 쉽게 잠정적 연애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그러한 방식으로만 캐릭터화되는 여성 출연자들이 느낄 압박감은 희화화되는 방식으로 은폐된다. <빠더너스>의 찌질함 재현은 기본적으로 가상적 캐릭터를 활용한다는 측면에서도 불편함을 덜어주지만, 구제불능처럼 보이는 주인공 캐릭터에 대해 ‘이해 불가능한' 사랑과 관용을 보여주는 캐릭터(애인인 찌니꾸와 엄마)들을 통해 찌질함을 초월함으로써 안도감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찌질함이라는 감정 너머로 들여다 보아야 하는 것은, 그러한 감정들을 자아내는 불균형한 자본의 분배와 개별 주체들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압박감이라는 구조적인 문제다. 동시에 그러한 찌질함들이 발현될 때 찌질한 폭력들의 피해자가 되는 주체들을(이를테면 손쉽게 사랑과 증오의 대상이 되는 여성 주체) 만들어내는 구조 속의 구조에 대한 문제다. 누군가에게 그의 찌질함에 대한 책임을 전부 물을 수 없지만, 무책임한 찌질함이 주로 상처내는 주체들에 대한 책임을 전혀 묻지 않을 수도 없다. 나의 찌질의 역사로부터 얻어야할 교훈은 그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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