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는 종교이며, 각본이고, 플랫폼이다. 연애는 종교이므로,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위안을 준다. 연애는 각본이므로, 무대 위의 배우처럼 그에 맞는 규칙과 대사를 연기할 줄 알아야 한다. 연애는 플랫폼이므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수수료를 지불해야 한다.
물론 각각의 사랑 방식은 무궁무진하게 다양하지만, 연애가 의례 의식처럼 사회적 약속이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기념일을 챙기고, 크리스마스에 데이트하고, 커플룩을 입고,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연애라는 규정에 사랑을 구속당하고 있다. 사랑하고 싶다면, 연애를 해야 한다. 왜 사랑을 하려면 연애를 해야 되는 것일까. 현재의 연애는 어떤 규정으로 형성되어 있을까.
# 정상 연애 이데올로기
“우리 오늘부터 1일이야.”라는 선언을 시작으로 연애라는 의례 의식이 시작된다. 정상 연애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연락 문제이다. 상대방이 불안하지 않게 꾸준히 연락해야 되고 간간히 전화를 섞어서 사랑을 확인해야 한다. 간혹 바쁜 일이 있거나 상대방이 약속이 있다면 잠시 연락이 늦어질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바쁘더라도 약속 자리를 옮길 때, 화장실을 갈 때, 잠깐의 휴식시간을 가질 때에는 꼭 자신의 상황을 보고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카톡하나 보내는 게 얼마나 걸린다고 그걸 못하냐는 상대방의 질책을 묵묵히 받아들여야 한다. 이와는 다르게 본인은 연락 문제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연인들도 꼭 하루에 한번씩은 연락한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이 정도는 기본이며 어렵지 않으니 무난하게 갈등 없이 연애 의식을 지킬 수 있다.
연애에서 가장 예민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성친구와의 만남이다. 정상 연애 이데올로기는 이성애 중심적인 연애관을 반영하기에 우리의 사랑을 방해하고 나의 애인을 뺏어갈 여지가 있는 잠재적 불륜 상대는 여사친/남사친으로 통용된다. 여사친/남사친 영역은 각자마다 폭넓은 스펙트럼 속에서 타협하기 마련이므로, 타협안이 완성되었다면 연인의 기분을 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성 친구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타협안을 꼼꼼하게 설정하고 명문화하는 것은 아니기에 ‘눈치껏’ 만나야 하는 상황이 자주 벌어지고 이 틈에서 갈등이 생길 가능성이 농후하다. 예를 들어, 이성 친구와 카페와 식사는 되지만 술은 안 될 가능성이 높으며, 식사까지는 가능하지만 웬만하면 점심 약속을 선호할 수 있다. 이성친구와 전화와 카톡이야 별 상관없는 사람들도 있으나 매일 연락하거나 밤늦게 전화를 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여사친/남사친과 매일 연락하는 것은 바람피는 행위의 전조현상으로 간주되며 밤늦은 전화는 애인이 있는 사람에게 배려 없는 행동이니 정상 연애관에서는 이를 조심해야 한다.
또한 연인 간의 만남은 그냥 만남이 아니라 데이트로 불린다. 아무거나 먹거나 익숙한 곳에 가기보다는 특별한 음식과 이색적인 데이트 장소를 물색해야 한다. 정보의 홍수 시대에 간단한 검색으로 블로그나 유튜브를 통해 특별한 데이트를 기획할 수 있으니 정상 연애를 무난하게 수행하려면 제대로 투자해야 한다. 혹여 오늘은 연인과 특별하지 않게 데이트하려면 ‘오늘은 간단하게 먹을까’라는 말을 미리 해서 상대방의 동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다행히 연애 기간이 길거나 자주 만나는 사이라면 여러 가지(금전, 시간) 부분을 고려해서 매번 이럴 필요는 없다.
결국 앞서 설명한 세 가지는 모두 ‘책임’으로 간주된다. 상대방에 대한 책임은 모두 지켜야 하는 문제로 연결되며 이에 대해 의무를 저버린다면 연인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규칙을 어긴 것이 된다.
# 탈연애
이외에도 정상 연애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연인 간의 의례 의식은 많을 것이다. 특히 연애에서 가장 힘든 이별조차도 의례 의식에 속한다.
이별을 선언함으로 관계는 종결된다. 이전까지 어떤 추억이 있고 어떤 사랑이 있든 이별 이후에 친구는 불가하다. 여기서 생기는 의문은 왜 이별 이후에 대부분 연인이었던 사람과의 관계를 백지로 돌리냐는 것이다. 상대방이 심한 잘못을 했거나 더 이상 관계를 지속하고 싶지 않을 수 있다. 그럴 때는 이별이 곧 마지막이 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서로 대화와 협의를 통해 이별 이후의 관계를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정상 연애 이데올로기 속에서 여사친/남사친만큼 불편하고 불안하게 하는 것이 전여친/전남친이다.) 할리우드 배우들의 사례처럼 전남편이 친구가 되고, 현재의 남자친구와 전남편이 친구가 되고, 전남편과의 자식들은 현 남자친구를 삼촌처럼 따른다. 물론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관계이기에 많은 대화와 협의가 필요하다. ‘이별 이후에 우리 친구하자’라는 간단한 말 한마디로 쉽게 친구가 되기에는 정상 연애 이데올로기의 힘이 강력하다. 지인 중 한 명은 이별 이후 1년이 지난 후 옛 연인과 친구가 되었다. 그 관계는 서로 힘이 되어주기도 하고 도움을 주기도 하고 재밌게 놀기도 한다. 이 관계는 잠시 친구가 되어 다시 예전의 연인 관계로 되돌아가는 로맨스 서사가 아니다. 이는 든든하고 의지할 수 있는 연인 이후의 친구 관계이다.
연인과 친구는 이분법적인 개념이다. 한 사람은 연인 또는 친구이지 두 개를 동시에 할 수 없으며 그 두 가지를 제외하고 다른 사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듯 ‘연인’과 ‘친구’를 가로축 양 끝으로 기준을 잡는다면, 그 사이에 있는 스펙트럼 속에는 수많은 관계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친구이지만 연인처럼 연락하고 싶은 사람, 친구이지만 가끔 설레는 사람, 연인이지만 자주 데이트하고 싶지 않은 사람, 연인이지만 육체적 접촉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 등 말이다. 한 사람과의 인연을 연인 또는 친구로 제한하기에, 그 외의 인연은 표준적인 규격안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멀어진다. 즉 이분법적인 친구-연인 구도 때문에 멀어지는 인연이 숱하게 많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친구-연인 구도를 넘어서 새로운 관계가 필요하다.
# 나가며
연애 각본을 너무나 충실히 잘 따랐기에,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점점 상상력이 고갈되어 상대방을 그 사람 자체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연인 OO로 바라보았다. 함께 있는 시간에도 연인이라는 틀에 스스로를 구겨넣어 행동했다. 마치 무대 위를 올라간 배우처럼 연애 각본에 따라 움직였다. 현재 연락을 하는 게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인지 역할극 때문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사소한 역할극이 쌓이다보니 애인은 사랑하는데 연애는 불편해졌다.
연애 각본에 따르지 않겠다는 선언은 결국 더 잘 사랑하기 위함이다. 아직까지도 연애라는 경계를 제하고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경계를 없애는 것이 문제의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무수히 많은 경계를 설정하는 것으로 이를 대체해야 한다. 무수히 많은 경계 속에서 연애라는 의례가 조금 자유로워지고 많은 사람들이 더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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