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수] 말하는 돼지는 '사람'인가요?

7월 30일 업데이트됨



*이 글은 네이버 웹툰 <데이빗>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개는 사람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였다.

“벽이 영어로 뭐지?”

“월월.”

“팔을 때리면 뭐가 생기지?”

“멍멍.”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무엇이지?”

“왕왕.”

한 사람이 반문했다.

“뭔 놈의 왕왕입니까. 완전 엉터리군요.”

그러자 개가 말했다.

“그럼 킹(king)인가요?”


이 농담의 전제는 개는 사람의 말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엉터리 질문으로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개가 실상은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사람들은 웃는다. 한번 웃고 휘발되는 농담의 특성상 그 개는 그저 웃긴 조크로 쉽사리 우리에게 잊히지만, 만약 이 조크의 주인공인 말을 할 줄 아는 개가 사라지지 않고 우리에게 한 번 더 말을 건다면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럼 킹(king)인가요? 근데 왜 그렇게 놀란 표정이세요. 나는 동물이 아니에요. 나는 연애도 하고 싶고 일도 하고 싶고 사람처럼 살고 싶어요.”라고 당신에게 말을 건다면, 더이상 농담으로 치부하기에는 상황이 조금 복잡해질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네이버 웹툰 <데이빗>이다. 데이빗은 시골 농장에서 태어난 돼지로 어려서부터 인간의 언어를 할 줄 안다. 생각할 수 있고, 책을 읽을 수 있으며, 미래를 그릴 수 있고, 인간처럼 욕망할 수 있다. 그런 데이빗을 사람들은 인간이 아닌 돼지라고 손가락질한다. 언뜻 종차별주의로 이 웹툰을 해석할 수 있다. 종차별주의란 인간이 자신의 종 이외의 종(식물, 동물 등)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태도를 말한다. 종 대신 인종이나 성별을 넣는다면 인종차별과 성차별주의가 될 것이다. 종차별주의는 만연하고 자연스럽지만, 다른 차별에 비해서 인지하고 인식하기 쉽지 않다. 인간에 대한 폭력과 동물에 대한 폭력이 다른 선상에서 논의되고, 동물에 대한 학대가 더욱 쉽게 이벤트화되고 놀이로서 이용되는 것처럼 인간에서 동물로 종이 바뀌는 순간 인지의 체계가 느슨해진다.

마찬가지로 1화부터 20화인 이 웹툰 대부분의 매화 베스트 댓글들은 데이빗에 대한 종차별주의적인 시선을 담고 있다. 데이빗이 차별받는 상황은 불쌍하지만 돼지는 돼지라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나고 지능이 있고 똑똑할지라도 육체는 돼지이기 때문에 사람이 아니다. 밥을 먹을 때도 인간과 다르고 두발로 일어설 수도 없으며 인간 사이에서 아이를 낳을 수도 없다. 아이를 낳는 가정조차 불결하고 혐오스럽다. 데이빗이 인권 단체 ‘스피릿’의 대표 캐서린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 이런 부분이 가장 두드러진다. 데이빗의 존재를 거부하는 과격단체인 PIP(Pig is not a Person)의 토마스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짐승의 가죽을 뒤집어 쓰고 있으면서 사람 흉내를 낸다고 진짜 사람인 줄 아느냐?”(14화) 토마스 목사의 심한 언행에 독자들은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데이빗을 인간으로 간주하기에는 인간과 돼지의 간격이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데이빗은 시종일관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싸워나간다. “어떤 방법이든, 나는 한시라도 빨리 사람으로 인정 받기만 하면 돼요. 그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11화) 그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한다. 그러나 여전히 독자들은 반감을 갖고 있다. “너는 말하는 돼지일 뿐이잖아.”

여기서 데이빗을 이해하기 위해서 두 가지 접근이 필요하다. ‘인간’답게 사는 것과 생물학적 ‘인간’이다. 데이빗이 자신을 ‘인간’이라고 칭하는 것과 독자들이 말하는 ‘돼지는 인간이 아니다’라는 명제는 이 두 가지 접근에서 다른 의미이다. 전자는 그동안 숨어 살며 자신의 욕망을 내비칠 수 없고, 짐승이라고 손가락질받는 차별적인 억압에 대한 해방을 의미한다. 반대로 후자는 육체에 대한 시각으로 돼지의 육체와 인간의 육체는 다르고 이 신체는 같지 않다는 의미이다. 결국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차별적인 제도와 인식을 바꾸어서 데이빗이 어떤 육체를 갖고 있든 생물학적인 인간과 다를 바 없게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지, 육체가 다르기 때문에 데이빗은 ‘인간’답게 살 수 없고 ‘인간’이 누리는 삶을 선택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돼지의 육체를 갖고 태어나서 데이빗이 차별을 받는 것이 아니다. 동물의 육체를 차별적인 시선으로 보는 그 기준이 데이빗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흑인은 백인이 될 수 없다. (될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인간’답게 살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피부색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의 기준이 피부색이기 때문이다. 데이빗이 돼지로 태어났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종차별주의적인 기준으로 데이빗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데이빗은 인간이 될 필요가 없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이다.

마지막 화에서 눈이 보이지 않는 도축업자는 데이빗을 인간으로 대한다. 돼지를 매번 도축하는 그는 혹여 칼로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까 두려워 데이빗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걱정)한다. 그 도축업자가 사실은 데이빗이 돼지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의 태도가 어떻게 달라질지는 궁금하지 않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도축업자를 만난 데이빗이 쉽게 사람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결국 데이빗과 인간의 경계는 여러 방법으로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 가능성을 희망으로 이어지길 바라며, 더 많은 ‘데이빗’들이 억압과 차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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