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5평’이라는 공간이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논란이 되었다. 발단은 지난 달 17일 입주자 모집을 시작한 ‘서울시 역세권 2030 청년주택’에 대한 한 트위터리안의 트윗 내용이었다. 해당 트윗은 역세권 청년주택에 대해 언급하며 5평 원룸 역시 거주하기에 비좁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해당 트윗에 대한 전반적인 여론은 “역세권 청년주택의 입지와 조건을 고려하면 좋은 조건이다”라며, “그것도 감지덕지이지 않느냐”라는 반응으로 수렴되었고, 경우에 따라서 “현실을 모르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철딱서니 없는 젊은이”라며 그 트위터리안을 조롱하기도 했다. 이 트윗 내용에 비판적인 의견을 보낸 이들은 지금도 많은 이들이 5평이 채 되지 않는 열악한 곳에 거주하고 있으며, 만약 역세권 청년주택의 공급면적을 늘린다면, 주거복지의 일환으로 제공되는 청년주택의 총 공급수가 감소하기에 더 적은 청년들만 혜택을 받게 될 것이라며 자신의 의견에 대한 정당성을 내세웠다.
물론 셋방에 거주하는 많은 이들이 다섯 평이 채 되지 않는 열악한 곳에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역세권 청년주택을 포함한 공공임대주택에 할당된 토지는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청년주택의 면적을 다섯 평 이상으로 늘린다면 공급되는 주택의 수가 감소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는 해당 트윗을 비판하는 이들의 의견처럼 역세권 청년주택의 혜택을 보는 이들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실적 조건을 고려한다면 해당 트위터리안을 비판하는 이들의 의견에 일견 수긍이 가기도 한다. 게다가 국토해양부가 산정한 1인당 최저주거기준은 14제곱미터로, 약 4.2평의 면적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5평의 역세권 청년주택의 공급 면적은 최저주거기준을 상회하는 면적이기에 더욱 문제될 소지는 없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보면, ‘역세권 청년임대주택’을 둘러싼 ‘5평’ 논란은 작은 해프닝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문제로 판단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논란을 지켜보면서 드는 불편함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먼저 논란의 발단이 되었던 ‘5평’이라는 공급 면적에 대한 세간의 반응을 다시금 살펴보자면, 상당수의 사람들이 ‘혼자’ 거주하기에 5평이라는 면적도 충분하다는 의견을 펼쳤다. 그리고 그러한 의견들은 그 온도의 차이와는 상관없이 “그마저도 주변 시세에 비해 낮은 편이니 주는 대로 받으라”는 측면으로 수렴된다. 그들은 “현실적인 조건을 고려한다면 어쩔 수 없다”는 근거를 제시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 역시도 발언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주는 대로 받으라”는 언설적 효과로 귀결된다. 주거복지의 차원에서 이와 같은 여론은 그 뉘앙스에 담긴 시혜성은 논외로 치더라도, 더 나은 주거 환경에 대한 논의를 가로막는 효과로 전이된다. ‘현실적인 조건’, ‘주변 시세에 비해 낮은 편’, ‘시장 논리’와 같은 수식어들 앞에서는 항상 인간다운 삶, 더 나은 삶, 쾌적한 삶을 위한 적정한 주거 면적에 대한 논의들이 기각되기 때문이다.
주거 면적은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다. 혹자는 5평의 면적이 “발 뻗을 곳 하나 없는 도시의 청년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필요한 면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과연 그것으로 충분할까? 몇 년 전, 도시 이주 청년들의 삶의 조건에 대한 연구를 위해 셋방살이 경험을 했던 몇 명의 청년들을 만나 심층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인터뷰 당시,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공간의 면적과 유형은 각기 달랐지만, 그들 대부분이 5평가량 되는 ‘방’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방’에 대해 “최소한의 삶”은 가능하지만, “자는 공간 이외의 기능은 하지 못한다”고 토로했다. 디자인 연구자이자, 한국의 주거 공간을 오랜 시간 탐구해온 박해천은 <아파트 게임>이라는 저서에서 이러한 공간을 ‘큐브’라 지칭한다. 물론 그가 지칭하는 ‘큐브’는 고시원과 같이 그 면적이 5평이 채 되지 않는 공간도 포함하지만, 전반적으로 도시로 진입한 1인 가구가 기거하게 되는 하나의 방으로 구성된 월세방을 통칭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큐브’의 면적이 임대수익을 극대화하는 선에서 결정되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5평’이라는 공간의 임대료가 주변보다 저렴하다는 것이 ‘인간다운 삶’을 위한 주거 공간의 조건이 될 수 있을까? 물론 발 뻗고 잠을 잘 공간만으로 인간다운 삶의 조건이 충족된다면야 할 말은 없다. 작업같은거 할 때면 공유 오피스 구해서 작업하고, ‘방’에서는 잠만 자면 될 것이다. 음식은 비좁은 부엌에서 라면을 끓여먹거나 요즘 활성화된 배달 어플을 통해 음식을 주문해서 먹고 살면 될 것이다. 옷이나 이불, 책 등의 짐 보관 역시 요즘 활성화되기 시작한 창고 서비스를 이용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돈은 언제 모아서 더 나은 조건의 ‘방’으로 갈 수 있을까? 박해천이 언급한 것처럼 이와 같이 “빨대 꽂힌” 삶 속에서 언제 ‘큐브’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이 외에도 이번 ‘5평 논란’ 속에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논란을 촉발시켰던 트위터리안의 트윗으로 돌아가 보자. 사실 트위터리안이 ‘5평의 역세권 청년주택’을 언급하며 수식한 말을 그대로 옮겨보자면 “대학생이니까” “사회초년생이니까” “출발하는 거니까” “시세보다 저렴하니까”와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말들은 그간 다수의 청년 정책에 따라 붙던 말들로, 기존 청년 정책의 방향을 암시하게끔 한다. 주거 복지의 일환으로 추진되는 ‘역세권 청년주택’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해당 공간을 정주가 아닌, 임시적으로 거쳐 가는 공간으로 상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5평’의 공간 역시 이와 맥을 같이하지 않을까? ‘임시적으로 거주할’ 최소한의 공간을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함으로써, 하루속히 그곳을 벗어나라는 것. 그리고 주로 면적으로 제공되는 공간은 한 이와 같은 주거 정책이 ‘함께 사는 사람’, ‘동거인’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불어서 청년으로 특정 지어지는 연령층에서 벗어나면 결혼하여 유자녀 가구를 이루지 않는 한, 그 혜택의 폭은 급격히 줄어든다. 이를 종합해서 생각하면, 정부의 주거 복지 정책은 ‘지나치는 시기’로서의 청년 1인 가구에서 이성애 결혼과 유자녀 가구로 이어지는 정상가족의 생애곡선만을 고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부의 복지 정책은 단순히 무언가를 시혜적(...)으로 베푼다의 의미도 있겠지만, 해당 분야에 일련의 기준을 설정한다는 상징 또한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기준을 조금 높여줬으면 하는 바람은 과연 지나친 것일까? 사실 비슷한 말들은 늘 반복되고 있다. 10년 전에도, 5년 전에도, 3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마치 도돌이표가 있는 것처럼, 반복해서 언급되는 말들에 많이 피로한 것은 사실이다. 뭐, 가엾은 청년들에게 이런 좋은 조건의 방을 제공해 주신다는데 불평 늘어놓지 말고 혜택을 받게끔 정보를 찾아보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합리적일지 모르겠다. 현실적인 조건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대체 언제까지 현실적인 조건을 생각하며 한 치도 나아가지 않을 것인가? 그리고 여성 비혼 1인 가구, 비혼 동거 가구 등 다양한 삶의 방식에 대한 고려는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질 것인가? 뭐, 이와 같은 말들은 10년 전에도, 5년 전에도, 3년 전에도 반복되어 왔다. 그리고 지금도. 대체 언제까지 반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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