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우] 지금 여기,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에 감춰진 것



[장면 하나]


마포와 회기를 오가는 261번 버스의 창밖은 노선에 따라 급격한 변이를 보여준다. 오피스텔과 모텔이 혼재한 회기역 사거리의 모습은 청량리역에 다다름에 따라 아직 잔존한 재래시장과 백화점이 상존하는 모습으로 바뀐다. 그리고 한동안 도심형 생활주택이라 일컬어지는 오피스텔과 상가와 쪽방이 공존하는 모습의 주거 공간이 밀집된 구역을 지나치고, 을지로에 다다르면 멀찍이 보이는 거대한 유리 외벽의 빌딩을 배경으로 한, 낮고 허름한 공구상가들이 나열된 공간이 나온다. 이곳을 기점으로 창 밖 도시 공간의 풍경의 양상이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장면 둘]

회기에서 을지로까지는 거대 쇼핑몰, 오피스텔 등의 초현대식 건축물과 아직 잔존해 있는, 이전 시대의 낡은 건축물들이 혼재된 풍경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을지로 입구와 명동, 그리고 서울역이라는 서울의 중심부를 지난 이후의 풍경은 사뭇 달라진다. 서울역 서부역을 지난 이후, 만리재 고개에 들어선 이후, 이와 같은 신-구 건축물이 혼재되어 있는 비중은 급격히 줄어든다. 버스 노선 주변에 들어선 건물들은 ‘Liga’, ‘KCC 웰츠타워’, ‘자이’ 등의 브랜드가 찍혀있는 육중하고-깔끔한 몸채를 뽐내고 있었다. 물론 만리재 고개에는 아직 잔존한, 낡은 건물들이 더러 보이긴 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거대하고 세련된 브랜드 아파트 사이, 혹은 ‘노스페이스’로 유명한 아웃도어 브랜드 ‘영원무역’ 사옥 건물 너머(혹은 사이)로 겨우 그 존재를 가늠할 수 있을 뿐이었다.


[장면 셋]


몇 주 전, 지도교수님과 저녁 식사를 하고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잠깐 들린 이문 1동은 내가 기억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흡사 폐가를 방불케하는 건물들에는 노란색 집행 스티커가 둘러져 있었다. 가끔씩 들려오던 개의 울음소리도, 셋방에 세들어사는 학생들의 대화소리도, 그리고 골목에서 안부를 나누던 어르신들의 인사말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불과 찻길에서 몇 걸음 들어섰을 뿐인데, 정적이 감돌던 골목에서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그 골목에 들어선 우리 일행 외엔, 인기척을 느끼고 도망가는 고양이 뿐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의 세 장면들은 내가 일상을 영유하며 항상 만나는 지점들이다. [장면 하나]와 [장면 둘]은 일주일에 여러 차례, 마포와 회기를 오가며 마주치는 장소들에 대한 이미지들이고, [장면 셋]은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마주한 장면이다. 이는 서로 다른 장소를 지칭하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서로 같은 위치를 지시하고 있다. ‘슬럼’이라는 위치. 서울이라는 대도시를 횡단하며 포착하게 되는 시각성의 변화가 슬럼이라는 비슷한 위치로 수렴하게 되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물론 건물의 외양으로 그 건물에 정주하는 이들을 가늠하는 것은 큰 실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 곳곳을 지속적으로 헤집어놓는 도시 재생-혹은 도시 재개발-은 낡은 도시 공간의 외관을 세련되게 바꿈과 동시에 많은 거주민들의 삶을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건물의 외양에 비례하게끔 바꾸어놓았다(물론 재개발을 앞둔 아파트를 보유한 채, 그 곳에 거주하는 이들을 비롯한 몇몇 예외적 사례가 존재한다). 더불어서 앞선 장면들의 허름하고 낡은 건물들의 대다수가 상가에 셋방이 딸려 있는 건물 내지는, 셋방과 쪽방들이 모여 있는 다가구 주택들이라는 점은 이 건물들이 단순하게 외양만 낡은 건물이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슬럼은 도시화에 따라 형성된 지극히 근대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슬럼은 급격한 도시화화 함께, 도시로 이주해온 열악한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이와 같은 슬럼은 여지없이 낙후된 주거와 지저분한 환경을 지닌 공간으로 그려지곤 한다. 많은 도시학자들은 슬럼의 형성과 함께 계급 분포에 따른 도시의 거주지가 분화되어 있음을 언급한다. 하지만 지금 여기의 슬럼은 과연 어떠한가?


기실 한국에서 슬럼은 주거형태적인 측면에서, ‘지옥고’라 불리는 반지하 원룸, 옥탑방, 고시원 그리고 쪽방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강남의 구룡마을이나 용산, 서울역의 판자촌과 같이 경우에 따라서 이와 같은 주거형태들이 밀집된 지역이 부분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에서 슬럼은 지극히 세밀화되어 분산되어 있고, 곳곳에 산재되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공간에 발을 디뎌보면, 여지없이 화려한 건물 너머로 드문드문 보이는 쪽방들, 많은 이들이 오가는 쇼핑몰 옆 골목에서 어스름한 불빛의 간판을 달아놓은 고시원들을 마주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슬럼이라 부를만한 건물들이 재개발로 인해 들어선 화려한 건물 이면에, 도심 곳곳에 산재되어 있음을 그 존재로서 증명하고 있다. 또한 [장면3]의 공간처럼, 아직 남아있는 쪽방과 셋방들의 밀집촌은 그 토지를 소유주들로 이루어진 조합원들과 토건 자본이 주축이 되어 시행되는 재건축 사업이라는 명목 하에 ‘래미안’, ‘자이’, ‘더샵’ 등의 브랜드를 새긴 육중한 건물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그곳에 거주했던 이들은 자신들이 거주했던 장소에서 도시 이면의 낯선 공간으로, 부초처럼 떠다니며 파편화되어 스며들어갈 것이다.


물론 슬럼이라는 공간만의 천연적인 특징이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 미국의 도시사회학자 마이크 데이비스는 도시화가 고도화된 지금 시점에, 슬럼과 슬럼이 아닌 곳의 구분을 명확하게 할 수 없으며, 그 거주민의 생활양식과 특성 모두 상이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거칠게나마 주거 빈민의 거주지를 슬럼이라 할 때, 지금 여기의 슬럼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나 없다.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은 세계적으로 화려함을 뽐내고 있지만, 그 화려함을 구성하는 세련된 외관의 건물 이면에는 여지없이 슬럼에 해당하는 공간들이 자리 잡고 있다. 도시 재생이라는 명분은 도시를 세련된 외형으로 탈바꿈하며 슬럼을 비가시화하지만, 슬럼이라는 공간은 항상 도시 곳곳에, 그리고 우리들 일상의 공간에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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