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우] 어떠한 매끄러움들.



몇 년 전 강남에 거주하는 지인의 집에 초대된 적이 있었다. 내 기억 속의 강남은 온갖 화려한 불빛과 상품들로 가득찬 시끌벅적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 친구가 불러준 주소에 위치한 공간은 같은 내 기억 속의 강남과는 전혀 달랐다. 조용한 아파트 단지들이 위치한 공간. 그곳은 여느 신도시의 그것과 흡사한 공간이었고, 그러한 시각성은 잠시나마 나에게 약간의 익숙함과 친숙함을 안겨줬다. 직접 그 공간을 거닐기 전 까지는. 자그마한 공원, 그리고 공원과 몇몇 고등학교를 끼고 있는 아파트 단지. 그 아파트 단지들은 모두 매끄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물론 모두 브랜드 아파트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그 깔끔하고 세련된 건물의 자태는 단지의 경계를 허물정도로 유사했다. 흡사 아파트의 평등이라고 불릴만한 공간. 살짝 위화감이 느껴질 찰나 마중 나온 친구가 나를 본인의 집으로 안내했다.

그 친구는 본인이 거주하는 아파트는 외부인 출입자 관리를 철저히 하기에 자신이 직접 나를 데리러왔다고 언급했다. 친구가 안내하는 대로 방문자 사인을 간단히 마친 후, 짧지만 긴 초대는 본연의 목적을 찾고 간소한 저녁과 긴 대화를 나눴다. 그날 우리는 평등에 대해 긴 대화를 나눴다. 집주인인 그 친구는 그날 평등한 삶과 사회의 필요성에 대해 강박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열변을 토했다. 주거의 평등, 권리의 평등, 삶의 평등. 참으로 주옥같은 그의 말에 나는 딱히 반박할 여지는 없었다. 너무도 당연했기에, 그래서 너무도 매끄러웠기에 그냥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날 우리의 대화에서 말의 몫은 철저히 집주인인 그 친구가 차지하고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객손의 입장에서 끄덕거리고만 있었다.

사실 누구나 다 평등한 시민이고, 평등한 권리가 있고 그러기에 평등한 삶을 누려야 한다는 그의 말에 딱히 이견은 없다. 다만 나는 그의 말에서 심한 이물감을 느꼈었다. 하지만 당시 나는 그것이 자격지심으로 비춰질까 두려웠기에 소심하게 고개만 주억거렸던 것 같다. 물론 자격지심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암묵적으로 반론이 허용되기 힘든 분위기, 그리고 누구나 동의할 법한 당연한 말 사이에서 내가 감각했던 이물감을 배출할 자리가 마련되어있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기나긴 대화 타래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내가 느꼈던 이물감에 대해 생각했었다. 아마 당시 나는 불균등한 말의 몫, 그리고 그 동네에서 본 깔끔한 외형을 지닌 아파트들의 평등에서 온 위화감에서 온 자격지심쯤으로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얼마 전, 진행하고 있는 연구의 인터뷰를 빌미로 그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구체적인 연구 내용에 대해 설명하기 전, 식사를 하며 여러 얘기들을 나누고자 했지만 그 친구는 또 강박적으로 평등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주거의 평등, 권리의 평등, 우리는 모두 같은 시민. 참으로 매끄러운 수사였다. 물론 당연한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몇 년 전 느꼈던 위화감을 다시금 느끼기 시작했다. 대체 왜일까? 이번에는 비슷한 말의 몫을 가져가고자 그가 강변하는 평등에 대해 넌지시 질문을 던져봤다. 물론 “당연한 얘기”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그러자 의외의 말이 돌아왔다.

“왜 다들 나같이 살면 좋잖아.”

이후 그는 평등과 시민, 민주주의, 그리고 이상향을 강남으로 설정한 도시적 삶에 대한 이야기의 보편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강남을 중심으로 한 도시적 욕망을 근간으로 하는 다름이 없는 동일함. 그때서야 내가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 그가 말하는 평등은 가난과 피폐한 삶들의 배제를 전제한 평등이었구나. 안락함, 편안함에서 온 라이프 스타일의 동질성, 그에 기인한 평등이었구나. 그가 말하는 평등은 내가 그의 집이 위치한 공간에서 느꼈던 아파트의 평등과 다를 바 없었구나. 철저한 위계를 기반으로 한 평등이었구나. 그는 모든 이들의 평등을 말하고 있지만, 그의 평등에서 타자는 존재하지 않았구나. 그의 평등은 당연한 얘기가 아니었구나. 어쩌면 일찍이 이를 인지하지 못한 나의 우둔함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말한 평등은 우리 사회에서 결코 예외적인 것이 아니었다.

평등, 시민, 민주주의. 모두 윤리적으로 올바른 가치들이다. 그렇기에 지금 여기의 도시민들은 모두다 스스로를 민주주의자이자, 시민이자 평등을 추구하는 이들로 지칭한다. 하지만 그들의 평등은 어딘지 모르게 매끄럽다. 다른 계급, 다른 환경에서의 삶은 그들의 평등에 결코 포섭되지 않는다. 오로지 표준으로서의 삶, 중산층적인 가치만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이따금씩 차이를 역설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규범적인 차이는 취향의 차이, 스타일의 차이에 국한되어 있다. 그렇다면 평등과 친연적인 관계를 맺는 다른 수사들은 어떨까?

가령 평등, 도시에서의 권리와 연결되곤 하는 시민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우리가 늘 이야기하는 ‘시민’은 과연 평등을 근간으로 하고 있을까? 아니, 우리는 모두 평등한 시민일까? 단적인 예로, 최근 전염병 국면에서 소양있는 시민의 윤리로 이야기되고 있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같은 실천들은 누구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인가? 모빌리티가 제한된 상황에서 타인의 물리적 접촉을 통해 버틸만한 사람들의 실천 윤리는 아닌 것인가? 사회를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 사회는 과연 누구의 사회일까? 물론 전염병이 확산되는 상황 속에서 사회적 거리두기, 비접촉의 윤리. 지당한 말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 접촉할 수밖에 없고, 누군가의 비접촉을 위해 접촉을 해야만 하는 이들, 그리고 요양원, 폐쇄병동, 노숙인 등 비접촉의 윤리에서 배제되거나 비가시화된 이들은 누구인가. 진정 평등을 추구하는 시민이라면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호혜적으로 보장받기 위한 논의를 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이와 관련한 담론을 꾸준히 만들어오고, 그에 따른 실천을 촉구해온 이들 역시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당면한 위기와 특정한 가치 앞에 그들의 목소리는 왕왕 묻혀버리곤 한다. 그리고 그렇게 묻혀버린 목소리는 그럴싸한 수사에 매끄럽게 봉합되곤 한다. 하지만 매끄러운 표면, 매끄러운 수사, 매끄러운 논리들은 늘 그렇지 않은 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평등, 시민, 민주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모두를 위한 가치로 언급되곤 하지만, 이러한 가치들마저 그것에 포섭되지 않는 존재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것이다. 표면만 매끄러운 가치들. 그리고 그러한 가치를 구성하는 의미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지 않을까. 더 많은 사람들이 매끄러움 이면으로 사라지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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