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집에 꽂혀 있던 ‘어린이 세계명작’ 시리즈 중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었다. 이 책은 <레 미제라블>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는 소설 중 5부인 ‘장발장’ 만을 떼어 어린이용으로 각색한 책으로 기억한다. 어릴 적 기억 속의 책에서는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장발장’이 굶주림에 시달리다 훔친 빵 한 조각으로 인해, 19년 간 감옥살이를 한 내용이 쓰여져 있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책은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다시 등장한 왕정 체제 하의 혼란스러운 19세기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책이다.
21세기의 동아시아의 어떤 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돌파한 세계적으로 꽤 부유한 나라다. 나름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섰다고 자부하는 이 나라에서 굶주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꽤 생소한 일로 여겨질 것이다. 여기서 ‘어떤 나라’는 바로 지금 여기의 대한민국이다. 빈부의 격차는 심하지만 그래도 굶지는 않는 나라라고 인식되는 바로 그 나라다. 하지만 얼마 전 뉴스 기사를 통해 19세기 프랑스의 ‘장발장’을 방불케하는 그러한 뉴스가 보도되었다. 한 30대 남성이 자신의 어린 아들을 데리고 우유와 사과를 훔치던 중 직원에게 붙잡혔다는 내용의 뉴스였다.
하지만 이 사건의 결말은 미담이었다. ‘현대판 장발장’이라 명명된 이 사건의 결말은 식료품을 훔친 남성이 눈물을 흘리며 잘못을 뉘우치며 사정을 설명하자, 이들이 물건을 훔친 마트의 대표는 처벌 의사를 철회했고, 경찰은 훈방 조치를 시키며 근처 국밥집으로 데려가 따뜻한 식사를 대접했다. 그리고 우연히 이들의 사연을 알게 된 한 시민이 국밥집으로 찾아와 현금 20만원이 든 봉투를 건네주었다. 이 사연은 싸늘한 한파 속 훈훈함을 안겨주는 사연으로 뉴스를 통해 보도되었다. 이후 보도를 접한 시민들은 해당 사건을 담당한 경찰서의 홈페이지에 미담의 주인공들인 경찰과 시민의 행동을 칭찬하는 글을 남겼고, 이는 청와대의 보좌관 회의에서까지 언급되었다.
참으로 따뜻한 이야기다.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인간의 선의가 아직 살아있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아직 세상은 살만한 것 같다. 그리고 연말연시를 맞아, 지금 거리 곳곳에서는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려는 빨간 냄비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필자도 측은지심을 잊지 않았기에 거리를 오가며 빨간 냄비에 만 원 짜리 지폐 한 장을 넣곤 한다. 만 원이면 국밥 한 그릇을 사먹을 수 있지만, 국밥 한 그릇으로 인한 든든함과 따뜻함 이상의 훈훈함을 얻을 수 있으니 꽤 수지맞는 장사라 할 수 있다. 아마 필자 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연말 연시를 맞아 등장한 빨간 냄비를 통해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을 떠올리며, 소소한 따스함을 가진 지폐를 빨간 냄비에 넣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어려운 이웃들에 대한 관심은 연말에만 떠오르는가. 물론 필자가 간사해서 그럴 것이다. 평소에는 내 통장의 초라한 통장의 잔고를 채우기 위해, 주변을 돌아보기에 바빠서 미처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그럴지언정, 연말에 국한되지만, 이 싸늘한 날씨에 자그마한 온정이나마 베풀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른다. 지금이나마 국밥 한 그릇의 온정을 베풀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는 비단 필자에만 해당되는 일일까?
불과 며칠 전, 주거의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한 행복 주택 건설이 지역 주민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불과 며칠 전, 수억원의 가치 증식을 이룬 이들을 대상으로 한 보유세와 종부세 인상에 대한 내용이 전해지자, 그 중 여러채의 주택을 보유한 이들은 부동산 카페 등지에서 보유세와 종부세의 인상분을 전월세 인상을 통해 충당하겠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물론 연말연시에 온정의 손길을 베푸는 이들과 이들이 동일한 이들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온정’이라는 긍정적인 단어로 수식되는 ‘손길’에 해당하는 행위들은 당연한 말이겠지만,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행위로 합의된 것들이다. 따라서 종부세와 보유세 인상에 맞서 세입자들의 임대료를 올리겠다고 댓글을 다는 이들이나 행복 주택 건설에 반대하는 지역 주민들은 대개 연말연시에 등장하는 빨간 냄비에 대해, 그리고 앞서 언급한 ‘현대판 장발장’ 미담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도움은 왜 항상 연말 연시에만 나타나는 것일까? 그리고 자기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을 것이라 여겨지는 이들에게 ‘도움'이라는 한시적이고 사적인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물론 이와 같은 행위는 정부의 복지 제도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자그마한 온기라도 전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당연하지만 나름의 긍정적인 기능을 한다. 하지만 이는 달리말하면 현재 시행되는 복지 제도들에 사각지대가 존재하거나, 충분히 삶을 영위할 만큼 제도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다시금 앞의 ‘현대판 장발장’ 사례로 돌아가보자. 해당 사건을 보도한 기사들은, ‘현대판 장발장’이 생계급여와 주거급여 등 기초생활보장수급을 받고는 있지만, 현실적인 생활비 수준을 고려할 때 그 지원 액수가 턱없이 부족 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이 앞서 언급한 ‘미담’과 함께 전해지자 이들 가족에 대한 시민들의 후원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시민들의 ‘선의’에 굳이 딴죽을 걸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시민들의 ‘선의’에 앞서, 연말의 빨간 냄비에 깃든 ‘시혜의 손길’에 앞서 정부의 복지 제도가 우리 사회 곳곳을 따스하게 비춰졌으면 어땠을까? 우리 사회의 연말-정경은 빨간 냄비와 여러 후원 메시지로 따스하게 재현되곤 한다. 올해는 그에 앞서 ‘현대판 장발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미담까지 더해져 한층 따뜻한 연말-정경을 구성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미담과 빨간 냄비에 깃든 선의들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정부의 복지가 미처 보장해주지 못한 지점에 더욱 눈에 밟힌다. 빨간 냄비와 우유와 사과,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가 선의와 시혜가 깃든 미담으로 제시되지 않을 정도로 모든 사람들이 최소한의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 그러한 사회가 올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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