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우] 민주주의와 평등



늦은 오후 내가 거주하는 건물의 골목이 시끌벅적했다. 단순히 골목을 거니는 행인들이 내는 소음인줄 알았건만, 다소의 소란은 꽤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데드라인이 얼마 남지 않은 작업이 방해되어 살짝 불쾌함을 느낌과 동시에 대체 무엇 때문에 저렇게 열띤 대화를 나눌까라는 호기심이 들었다. 베란다 문을 열고 그들의 대화에 잠시간 귀를 기울여보니, 어느 사내 둘이 가벼운 표정으로 참 무거운 얘기들을 나누고 있더라. 모 진보정당의 여성 정치인들에 대한 품평부터, 최근 떠들썩한 편의점 광고를 둘러싼 소요들, 최근 안티 페미니즘을 기조로 삼은 보수정당의 젊은 정치인에 대한 이야기 등등 참 다양한 소재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보, 보수, 페미니즘, 안티 페미니즘, 노조, 개인주의, 등 그들이 나누는 다양한 소재와 그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단어가 유독 귀를 멤돌았다. 그 단어는 바로 ‘민주주의’였다. 대체 민주주의가 무엇이길래 온갖 소재를 막론하고 주장의 방향을 막론하고 그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인가.

사실 민주주의는 우리 사회에서 하나의 공리처럼 여겨진다. 많은 논자들이 언급한 바 있지만, 지금 여기에서 모든 사람은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로 여기고 있으며, 민주주의는 누구나 응당 지녀야할 덕목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지금 여기의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여긴다. 고용자들을 착취하는 고용주나, 성소수자들을 정신병자라고 일컫는 이들, 김치녀 운운하는 남성들 모두가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여긴다. 따라서 역설적이지만, 웬디 브라운이 지적한 바 있듯이, 지금 여기의 '민주주의'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 모든 이가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로 정체화하는 시점에서 민주주의는 그 기표에 기입되는 어떠한 것이든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개인적으로 민주주의라는 것에 자꾸 물음표만 늘어간다. 통념적으로 인식되는 민주주의가 그 말 그대로 민주주의를 의미하는지도 자꾸 의심이 든다. 민중demos의 통치kratos. 과연 여기서 민중이란 누구이고, 통치란 무엇인가? 다만, 작금의 현실을 마주하며, 그리고 이른 저녁의 골목 언저리에서의 열띤 토론을 들으며 느껴지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공통 감각으로 소구되고 있는 민주주의는 다시 쓰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평등' 모두 좋은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에 반대하는 이는 아마 매우 적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이와 같은 가치들은 어떻게 작동하고 있을까? 그리고 올바르게 작동하고 있을까? 이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긍정적인 답을 내리지는 못하겠다. 지금 여기에서 언급되는, 그래서 실정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민주주의'와 '평등'이라는 가치 모두 '어떠한 이들의 배제'를 수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영토성에 의존한 '시민권'을 발급받은 이들만을 주체로서 여기는 가치, 그것이 작금의 민주주의와 평등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시민권 - 물론 이 시민권은 명시적인 시민권은 아니다 - 을 발급받지 못한 이들은 그 죽음마저 조롱받는 시대다. 그 누구도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하지 않고, 혹여나 '시민'들의 감각기관에 그들의 목소리가 포획된다치면 그것은 모조리 '잡음'으로 처리하며 그들에 대한 감각을 스스로 차단하는 시대다. 물론 '시민'들의 삶은 꽤나 풍요로워졌다. 특히나 '보통 시민'들은 적어도 밥은 굶지 않으며, '사람'으로서 사회에서 인식되지만, '시민'이 아닌 이들 - 난민, 소수자, 부랑자 등 - 은 그들의 '벌거벗음'을 추궁당하며, 그 존재마저 지워지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정치'를 이해가 상충하는 개인 혹은 집단 간의 의견을 조정하여 타협을 이끌어내는 과정이라 인지한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이것이 과연 '정치'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상충하는 의견의 조정을 통한 타협은 기존 사회 질서의 유지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이러한 과정을 목표로 하는 정치라는 것은 '치안'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 정치학과의 수업을 들으며, '정치'의 정의에 대해 묻는 교수자의 질문에 '몫의 분배'라고 답한 경험이 있다. 이를 앞서 언급한 벌거벗은 자들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 정치란 이해의 조정과 타협이 아닌, 몫이 없는 자들, 따라서 목소리마저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이들이 목소리를 갖고, 목소리를 내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자크 랑시에르는 이를 '배제된 자들의 주체화', '몫 없는 자들의 탈정체화'라 일컬은 바 있다. 가령 과거 전태일과 그의 동료들이 스스로의 정당한 몫을 요구하며 쟁투의 목소리를 냈던 행위, 수많은 여성들이 투표권을 주장하며, 대상화를 멈춰달라며, 주체로서 인정해달라며 목소리를 내는 행위가 바로 이에 해당될 것이다.

이들의 목소리는 사업주를 위시로 한 자본가, 이퀄리스트를 자청하는 '일부' 남성들이 제시하는 '조정적인 치안 논리'에 어긋난다. 따라서 사회 통념으로 제시되는 치안 논리 하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항상 '잡음' 취급을 받아왔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 앞에 목소리를 내는 것, 이것이 바로 정치의 시작이 아닐까 싶다. 몫 없는 자가 스스로의 몫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내는 것. 그러한 목소리를 통해 지각의 틀이 재편되는 것. 따라서 이주 노동자, 비정규 노동자, 여성, 성소수자 등 '배제된 자'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발생하는 것. 기실 권력을 얻는다는 것, 권력을 장악한다는 것은 주체의 변화를 수반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와 같은 '배제된 자'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를 감각하는 것. 나아가 이와 같은 이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 어쩌면 정치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특히, '민주주의'와 '평등'의 관점에서는 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배제의 도구'로 민주주의가 언급되고 있다. 민주주의를 이유로, 어렵사리 목소리를 내는 이들의 존재를 '잡음이나 내는 시끄러운 놈들'로 규정한다. 비단 저녁 시간, 열띤 토론으로 나의 조급한 작업 시간을 방해했던 이들에 국한되는 일만은 아니다. 여전히, 꾸준하게 이런 목소리는 지속되고 있고, 효율성, 개인의 자유, 심지어는 정체성을 이유로도 이런 말들은 여전히 힘을 얻고 숨쉬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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