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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승우] 골목의 흔적

최종 수정일: 2022년 3월 8일



내가 거주하는 동네의 전철역 앞은 여느 전철역이 그렇듯이 나름의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에 따른 혼잡함과 다소간의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전철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한 이곳은 역전의 소음은 들리지 않는 꽤 조용한 주거지역이다. 더불어서 이곳은 주변 대학에 진학한 이들이 거주하는 셋방들이 밀집된 공간적 특징을 지닌다.

나에게 이 동네는 내가 처음 서울에 정착한 지역이기도 하며, 비록 세세한 주소지는 계속 바뀌어왔지만 그 이후로 약 15년 간 정주한 장소다. 따라서 나에게 이곳의 정취, 분위기는 흡사 고향의 그것처럼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내가 거주하는 골목길의 시각성은 어느덧 내 삶의 감각 중 꽤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오랜 기간 한 장소에 정주한 이들이 그를 둘러싼 주변의 환경이 변화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나 역시도 15년간 이곳에 살아오며, 나를 둘러싼 주변의 많은 정경들이 바뀌는 것을 목격해왔으니 말이다. 그런데 얼마 전, 지금 거주하는 방의 재계약을 앞두고 연락을 취해온 건물주는 지나가듯 이렇게 말했다.

“아니, 이 동네에서 이렇게 오래 사는 총각은 별로 없네. 올해도 안나갈거지?”

이는 아마 지속되는 코로나 사태, 그리고 그로 인한 대학의 비대면 강의의 일상화로 주로 대학생들이 거주하는 셋방들로 구성된 이 동네의 공실화가 가속화되었기에 재계약 의사를 떠보려 건넨 말일 것이다. 실제로 내가 거주하는 다세대 주택은 공실이 잘 나오지 않는 건물이었지만 코로나 이후 꾸준하게 몇 호실 정도 공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치듯 건넨 주인집 아주머니의 말에서는 내가 오랜 시간 거주했던 이 동네의 특성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오랜 기간 이 동네를 살아오며 경험적으로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이 동네는 원주민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이다. 대부분 주변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이 잠깐 살다가는 동네. 그렇기에 이곳에서는 단독주택이나 방이 여러 개 딸린 빌라조차 찾아보기 꽤 힘들다. 대부분 방 한 칸으로 이루어진 다세대 주택들로 구성되어 있는 이 동네의 오래된 정주민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골목 너머로 보이는 아파트 단지에 거주한 이들이나, 다세대 주택의 꼭대기 층에 세입자와 함께 거주하는 몇몇의 건물주가 전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곳에서 마주치는 얼굴들은 대부분 한시적이다.

한편, 도시 유목민이 대다수인 이 동네에서 셋방살이 정주자로 살아간다는 건, 정주민으로서의 소속됨과 이방인으로서의 거리감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경험을 자아낸다. 그래서일까? 나는 시간이 나면 이 동네와 그 골목을 거닐며 주변의 변화하는 풍경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 같다.

사실 내가 처음 이곳에 거주하기 시작했을 때 만해도, 이 동네의 원주민이라 할 수 있었던 이들이 거주하는 주택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었다. 다세대 건물 사이사이에 위치한 그들의 주택은 때로는 위화감을 자아내기도, 때로는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각양각색의 시각성으로 자리 잡던 그러한 건물들은 어느 순간 익숙한 얼굴들이 사라짐과 동시에 주변의 여타 건물들처럼 여러 개의 원룸으로 구성된 다세대 건물로 바뀌기 시작했다. 지금 이 동네의 골목을 거닐어보면, 그와 같은 건물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동네의 익숙한 얼굴들, 그리고 개중에 친분이 있는 이들과 감자튀김을 앞에 놓고 맥주 한 잔 마시던 골목의 맥주집이 공인중개사 사무실로 변한 건 꽤 시사적이다. 각종 원룸 보수, 인테리어, 전열기 교체 업체의 광고판이 붙어있는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필두로 반찬가게는 허물어져 단기 위주의 계약과 게스트 하우스를 겸하는 자그마한 원룸 건물로 바뀌었다. 골목 입구 어귀에 마치 랜드마크처럼 자리하던 목욕탕은 허물어져, 도심형 생활주택을 짓기 위한 철근이 올라가고 있으며, 지물포와 청과점이 들어선 건물 역시 오피스텔 건물로 바뀐지 벌써 몇 년이 지나가고 있다. 골목의 터줏대감처럼 남아있던 슈퍼는 이마트 편의점으로 바뀌었고, 가끔씩 새로 들어온 원두로 커피를 내려 시음용으로 내줬던 카페 역시 원룸들로 이루어진 다세대 주택으로 바뀌었다.

다소 낡은 듯한, 그럼에도 비교적 오래 보아왔던 사람들의 얼굴들이 거주하던 건물들은 모두 세련된 외향의 다세대 주택, 도심형 생활주택, 오피스텔 건물로 바뀌어 가고, 그와 동시에 이름을 가늠할 수 있는 오래된 표정들을 볼 수 있었던 골목은 한시적으로 거리를 거니는 익명의 누군가가 지나치는 골목으로 바뀌었다.

사실 이곳을 특정한 장소로서 표지할 만한 어떠한 정체성으로 구획 짓는 시각에는 그렇게 동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여타의 대학 주변, 전철역 주변의 셋방으로 이루어진 거주 공간이 그렇듯이, 이곳이 ‘거쳐 가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는 것 역시 나름의 숙명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골목을 둘러싼 요 몇 년간의 일관된 변화가 지시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렇게 새로이 들어선 것들이 지워버린 것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러한 지워진 것들의 흔적이 지시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지, 나아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탐구는 이루어져야하지 않을까?

며칠 전에도 이 골목과 대로변 사이의 세탁소 건물이 허물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골목의 정적을 깨웠다. 이후 세탁소 건물이 철거된 곳에서는 포클레인이 땅고르기를 하고 있었고, 얼핏 들리는 말로는 그 부지에는 여러 호실의 원룸으로 이루어진 5층짜리 다세대 주택이 들어설 예정이라 한다. 내가 이 동네에 언제까지 살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여타의 공간과는 사뭇 다른, 이 골목에서 이루어지는 골목의 원룸화, 골목의 다세대화로 명명할 수 있을 듯한 골목의 젠트리피케이션은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지. 더불어서 그를 위해 이 골목에서 사라지는 것은 무엇인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골목의 흔적은 과연 남아있는지. 남아있다면 어떤 형태로 남아있는지. 골목의 흔적을 묵직하게 마주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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