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에 접속해보니 1년 전의 내가 태국에 있었다는 알림이 떴다. 해외는커녕 일상적인 대중교통 이용도 조심스러워진 요즘에 SNS가 알려준 나의 과거는 너무 생경하게 느껴지는 한편 이번 칼럼의 소재를 고민하던 참에 반가운 알림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그리워하는 요즘, 애틋한 태국 여행기를 풀어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보다는 나의 연구 한토막을 나눠보려 한다.
1년 전의 나는 동아시아 미백 문화에 대한 학위논문을 준비중이었고, 대학원생 해외조사 지원을 해주는 교내 프로그램을 이용해 태국 방콕을 방문했다. 태국은 동남아시아 국가 중 가장 큰 화장품 시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한국 화장품 수출 비중도 가장 높은 국가다. 자체적으로 유명한 미백 비누와 미백 크림을 생산하여 경쟁력 있는 미백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한편, 한국의 미백 미용에 대해 높은 관심을 표하고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과연 동남아 미백의 중심지답게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나타난 광고가 ‘스네일 화이트(Snail White)’라는 미백 기능성 제품이었다. 이 제품은 이후에도 방콕 시내로 들어가는 고속도로, 드럭스토어와 대형 쇼핑몰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제품을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어서 어느 드럭스토어에서 집어든 스네일 화이트 마스크팩에는 한국어 설명이 있었다. “완벽한 피부의 완성. 매우 효과적인 성분으로, 당신의 피부를 더 젊고, 빛나고, 밝게 재생시켜주는 마스크 시트입니다.” 최근 중국에서 유행하는 짝퉁 한국 화장품이 구사하는 정체 모를 한국어(예를 들어 “주위 피부 & 처럼 실크처럼 매끄러운 속성을 버려 불발탄 안 날아오는 쉽지 않을 것”와 같은 식)와는 달리 완전한 한국어 문장이었다. 그러나 스네일 화이트는 한국 달팽이 크림의 핵심적 원료와 기술을 도입했다는 것 외에 생산 과정에서 한국이 개입하거나 한국인 소비자를 타겟층으로 하지 않는 순수 태국 제품이다.
사실 애초에 조사대상지로서 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또 다른 미백 기능성 제품 브랜드인 ‘서울 시크릿(Seoul Secret)’의 광고를 보고서였다. 우연히 발견한 이 광고 속에서는 한국인처럼 생긴 여성이 또 다른 한국인처럼 생긴 여성의 얼굴이 있는 제품을 들고 서 있다(모델의 외양만으로 국적을 단정하기 어렵지만 한국인을 알아보는 한국인으로서의 느낌적 느낌이랄까). 그리고 하단에는 ‘콜라겐’이라는 한국어가 적혀 있다. 이 브랜드 또한 한국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다. 태국에서 인터뷰를 위해 만난 한 20대 중반 여성에게 ‘서울 시크릿’을 보여주며 이 브랜드가 한국 것이냐고 질문하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서울이라는 말 들어가면 한국어 아니에요”
‘서울’이라는 단어, 그리고 한국어 활자는 동남아시아 국가의 화장품에 부착되면서 다른 기의를 얻는다. 이들에게 서울은 맑고 하얀 피부 뷰티의 비법(서울 ‘시크릿’)을 지닌 도시로 코드화되어 있다. 초국적 소비와 산업의 지형 속에서 K-뷰티의 영향력이 닿는 국가의 소비자들에게 서울은 미백의 도시라는 집단적 기억이 형성되는 과정에 있으며, 이는 ‘서울’ 이라는 기표를 비롯한 한국어와의 조우 속에서 만들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또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인 베트남에서는 스네일 화이트, 서울 시크릿 같은 ‘유사 K-뷰티 제품’으로 ‘서울 화이트(Seoul White)’가 생산되고 있으며 서울 화이트는 로고 자체가 한국어로 만들어져 있다.)
그런데 이 ‘하얀 서울’이 그저 시장 내에서 유통되는 이미지를 넘어 하나의 권력이 될 때가 문제다. 서울 시크릿에서 출시한 제품 중 하나인 ‘스노우즈(SNOWZ)’ 광고는 태국의 배우인 크리스 호왕(Cris Horwang)이 자신이 어떻게 스타로서 지금의 위치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말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호왕이 “내가 나 자신을 돌보지 않는 순간, 내가 지금껏 노력해 온 모든 것, 나의 하얀 피부는 사라질 것이다”라고 말하는 동안 그녀의 피부는 점점 검어진다. 호왕의 옆에는 “나를 죽은 스타로 만들고 나를 대체해버릴 새 스타”라고 소개되는 밝은 피부의 여성이 있다. 광고는 “내 피부가 하얗다면 이길 것이다”는 문구로 마무리된다. 피부색의 밝고 어두움을 가지고 우열을 만드는 이 도식은 미백 광고의 오래된 시각적 레토릭이고, 여기에는 늘 백인과 유색인 간의 위계가 전제되어 있다. 흑인을 백인처럼 만들어 준다고 광고한 19세기 ‘피어스 비누(Pears’ Soap)’가 제국주의와 인종차별의 대표적 사례로 남아 있고, 한국에서도 미백 기능성 제품 광고가 이루어지던 초기에는 열대 지역 원주민의 피부가 하얗게 변하는 그림을 동원하거나 영국 여왕 사진을 미백의 이상처럼 제시하곤 했다. 그런데 서울 시크릿 광고 속 우열 관계가 신선하게(?) 보이는 이유는 태국인 크리스 호왕보다 우위로 설정되는 흰 피부의 여성이 백인의 외양을 한 것이 아니라 국적은 알 수 없지만 ‘서울’이라는 기표를 단 아시아인이기 때문이다.
이 광고의 인종주의적 성격에 대해 보도한 CNN 영상에 달린 댓글들 중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태국은 이제 한국 2.0이구나(Thailand is now Korea 2.0)”. 맥락상 이 문장이 전제로 하는 한국이란 ‘백인처럼 하얀 피부를 추구하는 한국’이다. 나는 학위논문과 최근의 연구를 통해 이 백인중심주의적 전제를 해체하는 담론을 추구해 왔다. ‘하얀 피부를 갖고 싶다’라는 한국인의 욕망을 백인 선망으로 환원하는 권력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그 욕망의 결을 읽어내려고 한다. 그러나 위계적 모방 담론은 백인과 유색인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얀 피부를 갖고 싶다’라는 한국인의 욕망이 동남아시아 영토에서는 K-뷰티를 통과하면서 ‘한국인처럼 하얀’, 조금 더 넓게는 ‘동북아시아인처럼 하얀’ 피부를 갖고 싶다는 욕망으로 변용되고, 또 다시 K-뷰티 산업은 이 욕망을 먹고 자라난다.
지구적 단위에서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의 격차를 의미하는 남북 격차가 경제, 정치, 문화 등의 차원에서 발생해 왔으며, 피부색은 그러한 남북격차를 시각화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K-뷰티의 미백은 아시아 내의 남북 격차를 드러낸다. K-뷰티가 고유의 미학과 산업적 토대를 형성하며 서구와 아시아 간의 남북 격차로부터 탈주하는 한편으로, 그 탈주선의 벡터에는 아시아 내에서의 남북 격차를 생성하는 제국적 권력의 잠재력이 있는 것이다. K-뷰티의 수출액 증가율이 지난 10년간 평균 30% 이상을 웃돌고 유튜브에서 수많은 ‘K-beauty tutorial’을 찾을 수 있는 이 시점에, 그 성장의 이면을 질문할 필요가 있다. “레드벨벳 조이처럼 하얀 얼굴을 갖고 싶어요”라는 태국 소녀의 말에서 서구 중심적 미의 위계의 해체를 발견할 것인가, 새롭게 형성되는 미의 제국주의를 발견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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