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엣지 오브 투모로우>, <퍼시픽 림>, <리얼 스틸>. 모두 2020년을 배경으로 하는 공상과학영화다.줄거리 소개 속에서 ‘가까운 미래’라고 소개되는 2020년이 우리에게 어느새 현재가 되었다. 검색창에 이 영화 제목들을 입력했을 때 출력되는 영화 속 2020년의 이미지들은 언뜻 도래하지 않은 미래처럼 보인다. 근과거의 인류가 상상했던 2020년은 로봇 일색이다. 그러나 실로 기술의 발전은 특이점을 향해 가고 있고, 지난 수년 사이에만 해도 로봇 기술이 우리 생활 곳곳에 보다 일상적인 형태로 들어오게 된 것도 체감할 수 있는 사실이다. 영화 속에서 극화된 설정과 스토리텔링으로 구현될 뿐 실제 2020년의 기술 발전 정도는 근과거에 상상한 2020년의 발전 정도와 크게 다르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2020년 현시점에서의 근미래에 대한 상상 속에는 더 정교하고 많은 로봇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상상 속에 동물은 어디에 있을까? 공상과학 영화 속에서 동물이라고 일컬을 만한 것은 유전자 조합을 통해 만들어진 괴물 또는 환경 변화로 인해 만들어진 괴물, 즉 괴물이 된 동물이다. (예외는 ‘기승전코카콜라’ 논란을 일으켰던 <설국 열차> 마지막 장면 속 북극곰 정도랄까.) 우리는 왜 미래에서 동물을 삭제하거나 미래의 동물을 괴물로 상상할까? 환경오염과 기후변화 속에서 이미 많은 동물들이 죽어가거나 변형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미래 속에서 동물을 포기해버린 것은 아닐까?
최근 개봉한 <해치지 않아>는 동물원을 되살리려는 사람들의 고군분투를 코믹하게 다룬 영화다. 대형 로펌의 수습 변호사 태수(안재홍 분)는 로펌 대표로부터 망해가는 동물원 ‘동산파크’를 되살리면 정식 변호사로 자리를 만들어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얼떨결에 동물원장이 된 태수가 방문한 동산파크는 이미 사채업자들에 의해 사자, 기린, 곰 같은 스타급 동물들은 몰수되어버리고 거의 텅 빈 상태이다. 그러나 성공에 목을 맨 태수는 포기하지 않고 직원들과 함께 동물탈을 쓰고 방사장 안에 들어가 동물 행세를 하면서 관람객을 끌어모으자는 작전을 짜 수행한다.
영화 자체는 자본주의 사회의 고용 문제와 환경 문제를 함께 엮어내고 있어 동물에 대한 인간의 윤리 문제만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는 역지사지의 자세를 의미하는 영어 표현인 ‘stand in one’s shoes’라는 말을 동물의 탈 속에 들어감으로써 몸소 실천한 인물들을 통해 영화는 동물원의 존재와 역할을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 비록 그 시작은 동물원 경영난 해소의 차원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동물원에 갇힌 동물의 고통을 체감하는 과정을 통해 동물권 이슈를 직설적으로 환기하고 있다. 정형 행동을 보이는 탓에 팔려가지조차 못한 동물원의 진짜 북극곰 ‘까만 코’가 철창에 머리를 들이받으며 울부짖는 동안, 다른 한 켠에서 하루 동안 북극곰이 되어본 전 동물원장 서원장(박영규 분)은 관람객의 시선과 조롱 속에서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고 고백한다.
동물을 포함한 자연은 최근 거론되는 ‘비인간적 전환(nonhuman turn)’에서 인공지능이나 로봇만큼이나 중요하게 사유되어야 할 비인간이다. 지난해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의 열변으로 세계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청소년 환경운동가 툰베리는 어른들이 기후변화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즉각적으로 대처해줄 것을 요구하며 “집에 불이 난 것처럼 행동해주기를 바랍니다. 이미 불이 났으니까요(I want you to act as if our house is on fire. Because it is.)”라는 말을 남겼다. 툰베리의 말은 사실이다. 호주의 산불은 남한보다 넓은 면적을 불태웠으며 이로 인해 야생동물 5억 여 마리가 죽었다. 동물은 인간의 포획과 시선 속에서 미쳐가고 산불 속에서 죽어가고 있다. 근과거가 상상한 2020년처럼 동물은 괴물이 되거나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때맞추어 신문연에서 진행하는 겨울 연합신세G의 존재론반에서는 클라이브 해밀턴(Clive Hamilton)의 <인류세(Defiant Earth: The Fate of Humans in the Anthropocene)>를 읽는다. 최근 곳곳에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인류세란 인간이 자연에 전례 없는 거대한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지질시대를 일컫는 용어로 제시되었다. 인류세를 인정하는 측과 부정하는 측,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측과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측 등 다양한 시각이 경합하는 가운데, 해밀턴은 인류세란 지구 시스템 전반에 균열이 생긴 것으로 이해해야 하며 이는 새로운 정치적 사유를 요한다고 주장한다. 그 새로운 정치적 사유란 그가 ‘신인간중심주의’라고 명명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기존의 인간중심주의가 인간의 자연 정복과 지구 주인 행세를 정당화함으로써 오늘날의 생태계 위기를 도래하는 데에 한몫 했다면, 신인간중심주의란 그러한 인간에게 지구에 대한 책임감을 부여하는 의미를 갖는다. 인간의 행위성이 지닌 힘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이를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려는 것이다. 신인간중심주의가 인간이 인류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도 구하는 ‘어벤저스’라는 식의 인간영웅주의로 변질되지 않고 보다 정치한 감수성과 윤리로 확장되어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인간이 무언가에 책임을 져야 할 때임은 분명하며 그 책임을 최대한 빠르게 실천으로 옮겨야 할 것이다.
(약간 스포일러 주의) <해치지 않아>의 결말은 여느 착한 코미디의 결말처럼 적당한 권선징악과 인간들 사이의 적절한 타협에 안착한다. 동물이 동물원의 울타리나 인간의 관리감독으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적 결말은 없다(물론 실제로도 동물원에서 사육된 동물을 야생에 마구잡이로 방생할 수 없다). 그러나 영화 속 인물들은 소시민의 역량 내에서라도 동물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한다. 영화 제목인 ‘해치지 않아’는 도입부에서는 해칠만한 능력이 없는 가짜 맹수 노릇을 하는 인간들의 기상천외한 연극에 대한 풍자적 발언으로 읽히지만, 결말에서는 동물들과 그들의 터전을 해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해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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