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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최종 수정일: 2022년 2월 18일


올 봄 학과에서 지원하는 연구사업에 준비팀으로 소속되어 일을 했다. 학과 내에 그간 누적되어 온 교수와 학생들의 연구 실적 조사를 모아 서식에 맞춰 정리하는데, 각 서식마다 제공되는 작성 방법 안내문에는 이런 문장이 공통적으로 있었다. “번역서는 인정하지 않음”. 이걸 보고 ‘쳇’ 소리가 절로 나왔던 것은 당시 내가 리처드 다이어의 저서 <White>의 번역본 <화이트> 출간을 앞두고 열심히 교정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공부 목적으로 번역을 시작해 2~3년에 걸쳐 조금씩 번역한 것이라 총 노동 시간이 어느 정도였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시간은 그저 기계적인 노동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마른 입으로 고구마를 먹는 듯한 인내를 요하는 시간이었다. 원서, 영어사전, 국어사전(더 적확한 한국어를 찾아내기), 구글(역주로 달 정보를 찾거나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유튜브(외국인 이름의 발음 확인하기)를 동시에 눈앞에 펼쳐 놓고 작업하다 보면 한 페이지 진도 나가기도 어려울 때가 있다. 여러 번 교정을 보았는데도 볼 때마다 새로운 오류들이 있었다. 대개 이런 대중성이 낮은 학술도서를 번역할 경우 역자의 몫으로 돌아오는 돈은 번역하는 동안 마신 커피 값만큼이라는 이야기를 익히 들었다. 내 경우에는 1쇄 분량에 대해서는 정액의 계약금을 미리 받았고 2쇄부터 정률의 인세를 받는 조건으로 계약을 했다. 번역을 하는 동안 주로 집에서 인스턴트 스틱 커피를 마셨으니 계약금을 커피값으로 몽땅 쓰지는 않았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대충 시급으로 따져보면 최저임금의 반의 반 정도는 되었으려나.


물론 나는 전문번역가도 아닐뿐더러 서툰 실력으로 잡아먹은 시간이 많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낮은 노동의 대가를 받은 것이다. (절대 출판사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얼마의 고생을 하건, 얼마의 보수를 받건, 번역자의 지위가 무엇이건 간에 중요한 건 이러한 노동의 결과물이 학계의 일부 기준 속에서는 실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진이 어떤 미션을 해냈을 때 진행자가 “선물로는 박수 갈채를 드립니다”하는 허무한 개그 코드가 떠오른다. 책을 내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격려와 칭찬의 말들을 전해 왔지만, 당장 다음 학기부터 취업시장에 내몰릴 나로서는 그 시간에 저널에 논문 한 편을 내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었을 것이다.


일본이 노벨상 강국이 된 이유에 대해 종종 높은 번역 수준이 언급되곤 한다. 일본은 문호 개방 후 유럽의 양서를 번역하는 것을 제일의 학술정책으로 삼았고 메이지유신 당시 번역국을 설치해 수만 권의 번역서를 출간했다고 한다. 현재도 일본 학계에서 번역서는 논문이나 저서만큼, 경우에 따라서는 그보다 더 큰 가중치를 부여 받기도 한다. 이런 환경이 지닌 강점이 단지 일본이 외국의 학술 담론을 빠르게 수입할 수 있다거나 일본인들이 외국어를 배울 시간을 아낄 수 있다는 점만은 아니다. 번역은 그저 문자 간의 일대일 대응 체계에 의존해 자국민이 독서 가능한 형태로 만드는 기계적 작업이 아니다. 번역가 발레리 라르보는 “번역은 삶과의 끊임없는 친밀한 접촉이다. 독서라면 그 삶을 흡수하여 소화하는 것으로 족하다. 하지만 번역이라는 것은 그 삶을 밖으로 잡아 끌어내 세포 하나하나마다 새로운 몸뚱이가 솟아오를 때까지 자기가 꽉 붙들고 있는 것이다”(정영목 번역가의 에세이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에서 재인용)라고 말했다. 즉, 번역은 다른 맥락에서 다른 언어로 만들어진 어떤 지식을 우리의 맥락에서 우리의 언어를 가지고 “새로운 몸뚱이”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이해 체계, 우리의 언어, 우리의 도구를 확장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번역의 목적은 이해가 아니라 생산이다.


그리고 그 생산의 효과는 좁은 의미의 연구자 집단 내에서 학술적 목적으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공교롭게도 <화이트>가 출간되기 사흘 전 미국에서 조지 플로이드의 아픈 죽음이 있었다. 그의 죽음에 빚진 나의 번역서는 출간 첫 주에 여러 일간지를 통해 소개되었다. <화이트>가 고찰하는 백인성(Whiteness)에 대한 소개와 함께 우리 안의 인종주의를 돌아 보자는 자성의 목소리가 이 책을 통해 기사화되었다. 어떤 일간지에서는 <화이트>와 함께 읽으면 좋을 책 중 ‘국내에 번역되어 있는 책’ 세 권을 추천해달라고 요청했는데, 고르는데 전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국내에 번역된 도서로만 한정하니 선택의 폭이 엄청 좁아졌고, 오히려 3권’이나’ 고를 수 있어 다행이었다. 나의 비연구자 지인들은 백인성은 그간 잘 몰랐던 새로운 주제라는 말로 소감을 건네왔다. 인종주의의 역사는 수 백 년이고 그 역사 안에서 플로이드의 죽음은 전혀 놀랍거나 새로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또 <화이트>의 원서가 출간된 지는 20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백인성에 관한 도서들이 충분히 번역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백인성은 매우 새롭고도 낯선 주제처럼 여겨지고 있다. 단일민족의 신화를 지닌 황인종 국가에서는 별로 담론화되지 못한 주제이기에 번역의 필요성이 낮았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번역된 적이 없기에 담론화될 기회가 없었을 수도 있다. 번역서 한 두 권이 더 나온다고 사회적 인식이 뒤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에게 백인성은 여전히 낯선 개념이고 인종주의는 먼나라 이웃나라 이야기로 여겨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Richard Dyer의 <White>를 읽을 만큼의 영어 실력을 갖지 않은 사람도 리처드 다이어의 <화이트>를 읽을 기회가 생겼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인종 담론은 1mm만큼이라도 성장하지 않을까.


이 세상 곳곳에서 자라나는 지식들이 있고 이 지식들을 우리 사회의 지식으로 자원화하기 위해서는 지식인 번역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모름지기 훌륭한 연구자라면 원서 정도는 뚝딱 읽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연구자 개개인의 외국어 독서 능력 향상만 기대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더 많은 주제로 더 많은 번역이 시도될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번역을 한다는 것이 그저 번역자 개인의 보람 있는 활동으로 끝나지 않도록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주어질 수 있는 공적 체계가 갖추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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