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기] 편드는 일의 용기



얼마 전 이선옥 작가의 신작 <단단한 개인>에 대한 홍보 글을 접했다. 책 표지에는 ‘누구의 편도 아닌 자리에서’ 라는 문구가 적혀 있고, 책 소개글은 “우리는 어떻게 타인의 생각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라고 물으며 “쉽게 선동되지 않는 개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나 자체로 온전한 자율적 개인이 되는 것은 지극히 근대적인 자아의 이상을 담고 있는 표현이지만, 그럼에도 혹은 그렇기에 이 책과 글들을 포장하는 방식은 찝찝하다.

<단단한 개인>은 누구의 편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그 순간조차도 개인은 누구의 편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의도적으로) 망각한다.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대부분 수사적인 자기 정당화에 그칠 뿐이다. 실제 누군가의 행동과 발화가 어느 편에 유리하거나 내지는 구미에 맞는지는 언제나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할 수 있는 사회적인 텍스트다. 나는 누구 편도 아니라는 담화에 담긴 진심을 믿어준다손 치더라도, 그 텍스트를 소비하거나 생산을 돕거나 상찬함으로써 거기에 가치를 더해주고 있는 행위자들이 어떤 성향의 인물들인지에 따라, 그 텍스트의 혹은 그 텍스트 생산자의 편을 확인할 수 있다. 이같이 행위자의 실천과 그 실천으로부터 파생되는 사회적인 연쇄 현상 이전에 나는 이쪽도 저쪽도 아니라는 발화만으로 그 발화의 내용을 정당화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자꾸 누구의 편도 아니라고 하지만, 자신은 “서둘러 편을 가르고 결론으로 치닫기보다는 과정의 공정성과 합리성에 집중”하는 글쓰기를 한다고 하지만, 이선옥과 그의 글쓰기는 선정하는 소재에서부터 텍스트가 활용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결국 페미니즘을 필두로 한 동시대의 정동적(affective) 신사회운동을 평가절하하고 그 반대편에서 전통적이고 근대적인 방식의 노동운동을 치켜세우는 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아가 안티-페미니스트들의 자기 정당화 논리로 ‘쓰이기도’ 한다. (몇십년도 더 지난 신사회운동(New Social Movements)이라는 개념을 여전히 써야 하는 것이 아쉽지만, 여전히 계급 중심의 노동운동과 다른 운동 사이의 경쟁 관계는 끝나지 않았다고 본다.)

그의 텍스트만 ‘어떤 편’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선옥이라는 필자가 그러한 글을 계속해서 쓸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인 관계 역시도 그렇다. <단단한 개인>의 추천사를 써준 인물들과 <우먼스플레인>에 이어 그의 글을 출판한 출판사 필로소픽, 그에게 정기적인 지면을 제공하는 <주간경향> 등은 최소한 그의 글쓰기를 사회적으로 승인하면서 일종의 편들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관계는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개인들이 ‘이성적인’ 글의 필요성을 ‘합리적으로’ 인식하고 판단한 결과로 나타나는 근대적인 계약 관계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천만에. 세상에 이념형을 닮은 합리적 개인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으며, 그렇기에 합리적이기만 한, 혹은 정치적인 부분을 배제한 경제적이기만 한 계약 역시 존재한 적이 없다.

탈진영도 진영이다. 어떤 편도 아니라는 선언은 하나의 ‘편’을 구성한다. 자신들은 어떤 ‘편’이 아니라 ‘상식’에 기초해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개인들’이라고 믿기 때문에 더욱 자기고양감을 주는 그런 ‘편’을 구성한다. ‘이성적인’ 스스로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선동당했다’라고 쉽게 말할 수 있게 되기에, 자신들이 한 편에 있음을 선언하지 않아도 강력하게 작동하는 ‘편’을 구성한다. 허나 나는 이렇게 자신에게 편이 있음을 숨기는 것 혹은 없다고 믿어버리는 것, ‘상식’과 ‘이성’과 같은 단어를 전유함으로써 스스로를 고양시키는 이러한 실천이 좀 비겁하다고 느낀다. 좀 더 나아가, 마치 진보(노동)도 보수(자본)도 아닌 중도라고 이야기하는 많은 정치인이 결국 보수(자본)의 편에 섰듯―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김미균 시지온 대표가 있다. 미래통합당서울 강남병에 전략공천되었다가 ‘문빠’ 논란이 일어 철회된 그는, 본인의 페이스북에 “좌와 우, 진보와 보수라는 틀”보다 “기업의 혁신, 발전하는 경제 시스템, 더 나은 국민의 삶이 중요했다”라고 썼다. 하지만 그는 미래통합당과 접촉하여 기회를 잡겠다고 마음먹은 그 순간, 그냥 그 편이 된 것이었다.―, 어느 진영의 편이 아닌 ‘이성’의 편이라는 사람들은 결국 어떤 중요한 불평등이나 불공정에 대해 눈감는 현상유지의 편에 선 것이라고도 본다.

자기 의도와는 관계없이 개인의 글과 말, 행동이 누군가의 편에 서게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은 본디 사회적인 동물이고, 언어를 통해 공동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가 특별히 편가르기를 조장하고 있어서, 혹은 탈진실(post-truth)의 시대라서 그런 것만이 아니다. 학자들은 타인으로부터 온전히 독립적인 개인(individual)이 성립 불가능한 근대의 ‘환상’이라는 것, 그리고 개인은 생각보다 자신 바깥의 것들(타인, 환경, 분위기, 미디어, 정동 등)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연구들을 진행해왔다. 내 힘으로 온전히 떠올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모든 아이디어는 사실 나 바깥으로부터 연유한 것이고, 또 내가 산출하는 모든 기호들은 타인과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 인간은 그러한 관계적 존재다.

자신이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을 망각하거나 망각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관계 내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겠다는 태도에 대해 좀 더 가치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편드는 일’이 ‘이성’의 편에서 진영을 형성한 사람들에 의해 언제나 폄하되고 낙인찍히는 이성 중심의 사회에서, 누군가의 편에 선다는 것으로 인해 자신이 입게 될 어떠한 상처와 위험을 감수하면서, 어느 편에 선다는 것은 얼마나 용기 있는, 때로는 감동적인 일인가. 지금의 편 들기가 나중에 어느 미래에는 회한으로 돌아온다 할지라도, 일단 그 길을 가는 윤리적인 결단. 인류를 여기까지 이끌고 온 힘은, 이성이라는 장막 뒤에 숨어 대중의 한심함을 조소해온 사람들이 아니라 좀 더 용감하게 무언가를 편들어오고 실천해온 사람들과 그 관계망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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