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기] 청년은 보수화된 괴물이 아닌데요



20대 청년들의 정치의식이 또 다시 논쟁의 도마 위에 올랐다. 서울시장 선거 여론조사에서 20대의 60.1%가 지지 후보로 오세훈 후보를 선택한 반면, 박영선 후보는 21.1%에 그친 탓이다.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후보는 유세 과정에서 “20대는 경험치가 낮다”는 언급을 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과거 20대는 미성숙하다거나 ‘전교조의 영향을 받았다’거나 하는 말들을 지금의 야당인 보수 진영 정치인들이 주로 해 논란이 됐던 것을 생각해보면, 젊은 층에 대한 언어가 얼마나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임의적으로 골라지는 것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청년 보수화’에 대한 우려는 문재인 정부가 20~50대의 압도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집권한 이후에도 이따금씩 불거져 나왔는데, 특히 ‘20대 남성’ 코호트에서 좀 더 일찍 정부에 등을 돌린 비율이 매우 높게 나타났을 때, 그리고 ‘인국공 사태’와 같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을 둘러싼 공정성 논란의 맥락에서 유난히 청년의 보수화 담론이 증가했다. 일반적으로 청년세대는 개인주의화되었고, 어릴 때부터 경쟁과 능력주의를 내면화하여 ‘차별을 찬성’하기까지 하는 비뚫어진 공정성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식의 인식이 학계와 언론을 통해 이미 주류화되었다.


그러나 나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원칙적 지지함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반대’와 관련한 공정성 주장을 사회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단순 기각할 수 없으며 좀 더 풍부히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있다.


우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하는 청년들이 형평(equity) 내지는 기회균등의 원칙만을 과도하게 주장한다고 보는 것은 다소 이론의 범주를 현실에 납작하게 대응시키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을 낳는다. 공정성 개념에 관해 연구자들은 한 주체에게 “절대적인 가치”나 “신념 체계”로서 공정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상황적 맥락”, “개인의 주관적 태도”, “문화적 맥락”, 나아가서는 “감정” 등의 영향을 받아 발현됨을 강조한다. 개인이 형평(equity)과 균등(equality), 필요(need)와 관련한 공정성 원리 중 하나에 일대일 대응되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 공정성 원리에 모두 다 반응하는 잠재력을 가진 개인이 상황에 따라 다른 비율의 공정성 감각과 이에 기반한 공정성 주장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형평(equity)이라는 공정성 감각은 무조건적으로 위악이라고 할 수 없는데, 형평 원칙은 “투입에 따른 보상의 형평성”에 대한 감각을 일컫으며, 예컨대 이는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에 비해 적은 보상을 받는다고 느낄 때, 혹은 경영자의 보상이 너무 과하다고 느낄 때 행동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이기도 하다. 나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반대자들에게서 형평 원칙에 찌들어 있는 ‘신자유주의를 내면화한 공정 전사’를 찾아내는 대신 오히려 “상황적 맥락”이 변화했을 때 다른 방식의 의견을 갖고 행동할 수 있는 잠재력을 발견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비판자는 이들이 형평 원칙에만 매몰되어 결과의 불평등 내지는 귀속 지위에 따른 불평등 등에 눈을 감는다고 하지만,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정책을 비판하는 누군가가 동시에 ‘기본소득’과 같은 분배 아이디어에 동의하거나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에 찬성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많은 사회조사는 청년들이 연고나 부모의 재력 등 ‘능력 밖의 요소’가 성취에 대해 갖는 영향력에 대해서 잘 인지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한국 사회가 형평 원칙뿐만 아니라 균등 원칙, 필요 원칙 등이 지켜지지 않는 불공정한 사회라고 인식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능력 내지는 기여에 따른 보상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현상이,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형평 원칙조차 지켜지지 않는 불공정한 사회라는 점을 간파하는 위치에서 출발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구조나 제도적으로 우리 사회가 “능력에 따라, 기여한 만큼 보상받는” 형평(equity)의 측면에서 공정한 적이 없는 사회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크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임금 차별은 형평 원칙에서 어긋나는 것이다. 연공급제로 인해 사실상 업무 일선에서 거리가 먼 윗세대가 훨씬 더 많은 노동 강도로 착취되는 아랫세대보다 훨씬 많은 연봉을 가져가는 것 또한 형평 부정의의 감각을 형성한다. 부동산 문제나 불법/탈법적인 세습, 반칙의 문제도 결국 (균등이나 필요가 아닌) 형평의 문제와 관련된다. 형평에 대한 열망은 그 방향이 잘 조정된다면 분명 좀 더 좋은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재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똑같은 입사 절차를 거치지 않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단순히 정규직화하는 것’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갖는 분명한 보수성에 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절차적 공정성(procedural justice)의 맥락에서 이것을 조금 더 풍부하게 해석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절차적 공정성은 보상의 분배 결과뿐만 아니라 보상의 결정 과정이 공정성(형평성) 감각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지시한다.


2년 전, 서울교통공사에서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반대하며 민주노총 산하 노조를 탈퇴하여 한국노총 산하 노조에 가입하여 활동한 20~30대 청년들을 인터뷰한 일이 있다. 그들은 당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며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자체보다도 그것을 당연한 진리라고 여기면서 다른 생각을 여기는 이들에게 발언과 참여, 활동의 기회를 주지 않는 선배 노조 활동가들에게 더 분노했다고 이야기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관해서는 자신들을 포함한 기존 정규직 사원들과의 합의 과정을 거쳐 납득할 수 있는 전환 절차를 만든다면 끝까지 반대할 일도 아니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인천국제공항공사 건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구별지어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각각에게 얼마나 유리한지 아닌지, 즉 보상의 결과와는 별도로 보상의 결과를 정하는 과정이 정부 시책으로 탑-다운되었다는 데서 당사자들과 거기에 이입한 시민들이 불공정을 감각했을 수 있다. 이는 과거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사례에서와 완전히 마찬가지라 할 수 있겠다.


‘공정성 담론’은 결과의 불평등이라는 전제 없이는 불가능하다. “상황적 맥락”으로 인해, 즉 극심한 결과의 불평등을 알고 있으니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위로 올라가려는 경쟁이 심해질 뿐 ‘공정성 담론’을 발화하는 이들이 형평 원칙에만 따르는 교과서적인 경제학적 인간과 같은 괴물은 전혀 아니다. 청년들의 공정성 인식을 두고 마치 이들이 ‘다른 인종’이라도 되는 마냥 묘사하는 것에는 너무도 힘이 없다.


문재인 정부의 초기로 돌아가 자료 하나를 살펴보자. 2017년 8월 문체부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정책에 대한 지지도를 조사했다. 전 연령대 중에서 20대가 61.1%로 찬성 비율이 가장 높았다. 전 연령 평균은 56.0%였다. 청년들은 ‘평등’한 세상 대신 ‘공정한 경쟁’을 원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사회의 다른 시민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분배를 둘러싼 논의에 참여할 수 있는 성원권을 박탈해야 할 ‘위험한 존재’는 더더욱 아니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낸다고 해서 다른 세대를 악마화하는 발언을 쉽게 하는 것부터 그만두어야 한국사회의 분배 원칙 재설계에 대한 좀 더 열린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용한 다양한 공정성 이론은 다음의 글을 참조하였습니다.

박효민, 김석호 (2015). 공정성 이론의 다차원성. <사회와 이론>, 27, 219-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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