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기] 전환의 말



  4주에 한 번 <한겨레>에 칼럼을 기고한다. 수요일 저녁 온라인에 글이 공개되는 다음날, 목요일마다 루틴처럼 반응들을 한 바퀴 살핀다. 우선, 페이스북 타임라인. 다들 ‘좋아요’만 눌렀거나, 좋은 말들밖에 없다. 좀 심심하다. 그렇다면 역시 ‘매운맛’을 보기 위해 네이버뉴스로 들어간다. 댓글은 주로 절망적이다. ‘청년’ 얘기를 쓰면 거의 100% ‘일할 생각은 안 하고 나라한테 돈 달라는 거냐’는 반응이 달린다. 죄송한데 난 ‘청년이나 나에게 돈 달라’는 내용의 칼럼을 단 한 차례도 쓴 적 없고, 칼럼 기고한 게 나의 일이고 수입원이다. ‘페미니즘’의 ‘페’ 자만 보여도 그걸 붙잡고 늘어지는 댓글이 달린다. 오늘 발행된 칼럼에서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대해서 ‘공정성’ 아닌 다른 맥락에서 비판했는데, 글을 읽은 건지 아닌지 ‘너는 볼트 하나라도 박아봤냐는’ 댓글이 달렸다. 사실 가끔 이런 댓글을 다는 사람들의 가장 큰 목적은 글쓴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글을 못 쓰도록 막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 하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상처받지 않는다. 또 계속 말할 것이다. 그럴 수 있는 태도와 용기가 세상에 내놓는 글을 10년 이상 쓰다 보니 생긴 가장 큰 자산이다.


  이런 댓글들을 볼 때 내 고민은 오히려 다른 쪽에서 생겨난다. 나를 모욕하는 듯한 말에 나는 별로 상처받지 않는다. 대신 ‘나는 왜 모욕감을 느끼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고개를 들어 나 자신의 윤리 문제로 되돌아가곤 한다. 내가 그 댓글에 대해 별 감정이 들지 않는다면, 내가 그들의 말을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 진지하게 취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은 아닌가. 사실 ‘무시’야말로 가장 커다란 모욕이다. 우리는 하다못해 ‘카톡 읽씹’과 같은 사소한 순간에까지 자신이 무시 받았다고 느끼면 상대가 나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식의 모멸감을 느끼곤 한다. 물론 댓글에 상처받지 않는 방식의 무시가 그 댓글을 쓴 사람에게 가닿지 않겠지만 말이다.


  상대의 얼굴이 보이는 대면 상황에서도 비슷한 일은 곧잘 일어난다. 오늘 처음 만난 청중 앞에서 하는 강의는 거의 항상 그렇다. 어찌 보면 누군가의 팬이라서 어떤 강의에 참석한 사람이 아니라면, 청중이 강사가 전달하려는 의견 전체에 끄덕끄덕 동조하는 게 더 어색한 일일 수 있다. 내가 다른 사람의 강의를 듣는 상황을 생각해봐도 그렇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매 순간 떠오르고, 그럴 때마다 내 안의 불쾌함을 표정에서 잘 숨기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데 강의하는 자리에 서서 보면 그 불쾌함을 잘 숨기지 못하는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몇몇 보인다. 더 큰 당황스러움은 질의응답이 시작되자마자 그 불쾌한 얼굴이 손을 들고 이야기하는 순간에 나타난다. 많은 경우 강사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왠지는 모르겠지만 몹시 화가 난 듯한 말투와 제스처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때때로 그의 격앙됨이 나한테 전해져서 다시 내 가슴이 쿵쾅대는 반작용이 일어날 정도로.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는 간단치 않다. 주로 내가 취해 온 방식은 두 종류였던 것 같다. 적극적으로 ‘내 강의는 이런 내용으로 이런 걸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내 이야기를 재차 설명하거나, 다른 질문으로 빠르게 넘어가기 위해 “의견 감사합니다.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 정도로 정리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두 방법 모두 근본적으로는 상대의 말에 대한 무시에 가까운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한 대응이 결국 ‘너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내가 다시 설명해줄게 들어봐’ 혹은 ‘사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게’의 양식 있는 버전이었다는 것을 듣는 사람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최근에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강사인 나만 강의실 맨 앞에 서 있고 스무 명, 서른 명이 앉아 있는 상황이 아니라 나와 몇 명의 청중들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심통이 난 듯 나에게 여러 마디를 쏟아내는 청중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시 어떻게 이 상황을 모면해야 하는지 생각을 좀 했는데 이번 경우에는 왠지 용기가 생겨 그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내 목소리도 흥분된 톤으로 나오지 않을까 걱정을 한 차례 거쳐 나름 안정된 톤으로, 방금 하신 이야기를 이러이러한 취지로 들었는데 나 역시 그 의견에 동의한다고, 다만 나는 이러이러한 문제도 조금 더 생각해 보면 더 좋은 대안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할 뿐이라고 이야기했다. 무엇을 더 과장하거나 일부러 그 사람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한 건 아니었고, 솔직하게 내 할 말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 나에게 불만을 털어놓던 그 사람의 표정이 풀어지는 것을 감지했고, 그 사실이 좀 놀라웠다. 우리는 제한된 시간 동안이었지만 몇 마디 정도의 진지한 대화를 더 나눌 수 있었다. 그에게 어땠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나는 그 대화가 나름 만족스러웠다. 어떤 승리감 따위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나에게 비판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과의 대화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내 스스로의 얘기를 조금 거창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해 민망하긴 한데, 이 경험에 이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에 휩싸여 있는 것 같은 사람을 무시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말을 걸었다. 그리고 그 사람 역시, 내가 그를 대화상대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고, 우리는 서로 그 추상적인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 모든 말은 그 자체가 행동이고, 어떠한 힘을 가진다. 내가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는 대신 내가 동의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좀 더 솔직히 말한 선택을 한 건, 어쩌면 이 관계를 서로에게 적대적인 상태에서 호의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상태로, 또 두 사람의 감정을 뭔가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 진정된 상태로 바꾸는 ‘전환의 말’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테다.


  사실 나는 나 스스로 별로 솔직하지 못한 인간이고, 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비겁해질 때가 얼마나 많은지를 알면서 산다. 그래서 언제나 좀 더 솔직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식의 망상을 하기도 하고, 특히 좀 더 편안하게 대화를 조절해나가고 상황을 바꾸어나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도 생각한다. 특히 자신의 몸에 체화된 모든 습관이 연구 역량이 되는 질적 연구자로서도 그런 동경을 느낀다. 인터뷰가 산으로 갈 때 연구참여자의 관심을 적당한 ‘전환의 말’로 돌려놓을 수 있는 사람, 아니면 동료들과 갈등 상황이 있을 때 격앙된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전환의 말’을 몸으로 알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어쩌면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미시적으로 조정하는 이런 ‘전환의 말’들의 힘이 쌓이면, 거대 이론이나 정책 노선을 개발하는 학자의 작업이나 권력을 장악하려는 제도정치 내에서의 투쟁만큼이나 혹은 그것들보다 더 사회를 일정하게 변화시키는 강력한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칼럼을 마무리하며, 사실 ‘전환의 말’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나에게는 가장 많이 떠오르는 하나의 사례를 공유한다. 이미 처음 들은지 10년도 넘은 얘기. 상용직으로 회사를 다니며 월급을 따박따박 받는 A가 활동가의 삶을 선택한 B에게 이야기한다. “너 그렇게 살면 불안하지 않아?” 실제로 활동가의 삶이 불안한 B는 이야기한다. “어, 불안하긴 하지.” 그럼 그때부터 A는 B에게 인생 조언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런데 B가 여기서 ‘전환의 말’을 던진다면? 그 전환의 말의 내용은 이렇다. “아니, 안 불안해. 이건 내가 선택한 삶이고 난 행복하고 좋은데?” 그럼 그때부터 A는 B에게 사실 자기가 불안하다며 자기 고민 상담을 시작한다. B에 해당하는 사람이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이고, 스스로 오랫동안 지인들에게 실험을 해 본 결과 거의 백발백중. 그 이후로 나도 사람들한테 몇 번 써 먹어봤는데 어김없이 상황이 전환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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