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기] 이것은 왜 사회과학이 아니란 말인가



‘청년’이라는 단어가 정책과 연구, 과학의 대상으로 들어오면서 이 단어는 빠르게 수량화나 조작화 가능한 방식으로 다시 정의된다. 청년 관련 조례, 법 제정 과정에서는 누가 정책 대상자이고 누가 아닌지를 선별하기 위하여 청년의 연령 구간을 정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논쟁거리가 된다. 통계적 방법을 사용하는 연구자들 역시 ‘청년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서 몇 살부터 몇 살까지를 청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지를 정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규정은, 사실 청년이 정책 언어로 포섭되기 이전에 이미 사용되고 있는 맥락들과 마찰을 일으키기도 한다. 여러 지역(local)에, 특히 농촌을 중심으로 잔존하는 청년회에는 특별히 연령 제한이 없어서, 새로 제정된 법적 기준으로는 청년이 절대 될 수 없는 사람들이 청년 노릇을 여전히 하고 있다. 약 10년 전만 해도 20대는 스스로를 ‘청년’이라는 범주 안에서 이해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들은 ‘대학생’, ‘취업준비생’이거나 ‘근로자’, ‘노동자’ 혹은 ‘백수’였다.) 이제는 스스로 ‘청년’이라는 단어에 공감하느냐 아니냐를 물어볼 필요 없이 만 19세에서 34세까지의 사람은 모두 청년으로 규정 받는다.

나는 청년기본법이 정한 ‘청년’과 일상 언어로서의 ‘청년’, 사회과학/정책 연구의 대상으로서의 ‘청년’ 등 다종한 ‘청년’들 사이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의미들의 괴리와 공백, 낙차 따위에 상당한 관심을 두고 있다. 또한 ‘청년’이라는 말이 이 연령 구간 내에 실존하는 천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지식을 확립하고, 이들의 품행을 특정한 방식으로 인도하거나, ‘청년’이라는 언어 안에 누군가를 포함 및 배제하는 종류의 권력 작용들을 더 파헤치고 말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종종 ‘청년’에 대한 사회과학의 상식 또는 도그마에 의문을 표하는 논의를 꺼내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 가지 예시를 들어보겠다. 청년실업률은 만 15세에서 29세까지 경제활동인구 중 실업자의 비율로 계산한다. 청년기본법이 정한 청년 연령인 만 19세에서 34세까지와 맞지 않는데, 이는 청년기본법보다 먼저 만들어진 청년 관련 법제인 청년고용촉진특별법이 청년을 만 15~29세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며, 국제적으로 비교 가능한 청(소)년(youth) 지표들이 주로 만 15~24세 연령을 따르는 탓도 있다. 고용 관련 각종 지표가 이 15~29세 연령구간을 기준으로 하여 연령대 내의 전체에 대한 대표(representation)를 자임하는 수치를 제시하는데, 여기에는 중요한 한계들이 있다.

현재의 청년실업률은 큰 틀에서 두 가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하나는 만 30~34세 청년들의 실업률이나 고용률 등이며, 30대 고용지표(경제활동참가율, 고용률) 자체는 20대의 그것과는 달리 특별히 악화하는 상황이 아니다. 나는 여기에서 노동시장 이행/진입 지연의 사회 규범적인 한계선이 ‘서른’이라는 상징적 나이에 걸쳐져 있음을 본다. 아직까지는 일자리에 대한 선택이나 진로 모색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며, 일부 중산층 부모들은 그러한 자녀들의 미취업 상태를 금전적으로 보조하기도 하는 20대 시기의 이행 지연 및 불평등한 이행 과정은 절대적인 일자리 숫자의 문제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는 ‘청년 문제’다.

다른 하나는 만 15~29세 연령 내에서 세대 내 이질적 그룹의 분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비진학(고졸)청년이 만19세가 되자마자 일터로 향해 이미 20대 후반에는 10년 가까운 경력을 가진 노동자가 된다는 사실, 대졸 청년들도 스펙과 경험을 쌓으며 유리한 위치에서 첫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는 그룹과 당장 취업 가능한 자리를 일단 채워야 하는 그룹으로 나누어진다는 사실, 20대 후반에 입직을 하는 그룹과 20대 후반에 경력단절을 겪는 그룹(대부분 기혼 여성 청년)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청년실업률 지표만 가지고는 확인하기 어렵다.

청년실업률이라는 지표의 한계는 정부와 ‘정책 전문가’, 시민들이 가진 ‘상식’을 거쳐 증폭된다. ‘청년 문제’는 실업의 문제이며, 따라서 청년정책의 최우선순위는 실업률을 낮추거나 관리하는 데 있다는 것이 그 상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자리 창출 패러다임은, 청년정책이라는 말을 경유하여 예산이 중소기업 경영자 그룹의 이익에 돌아가게 하는, 실업률 수치 개선을 위해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를 양산하여 열악한 상황의 청년들에게 배치하는, 공공 일자리의 확대라는 명목 하에 많은 청년들을 공무원 시험에 몰두하게 하는 역효과를 낳기도 했다. 사실상 실업 지표가 너무 악화되지 않도록 같은 연령대 내에서 취업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집단이 이들임에도, 고졸 청년, 원가족 배경이 열악한 청년 등의 노동의 질이 악화되고 있는 상황은 ‘청년 문제’로 좀처럼 재현되지 않는 뒷순위로 밀려나버렸다. 우리는 사회과학에서 관행적으로 조작적 정의하고 있는 어떤 종류의 ‘청년’과 집계하고 있는 통계 수치와 해석 틀의 문제 자체가 이같은 부작용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단언할 수 없다.

‘청년’은 결코 실증주의적인 통계 처리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 단어가 실제로 의미하는 바가 구성되는 양상은 역사적, 지역적, 맥락적이며, 이 구성의 과정에는 ‘청년’의 어떤 맥락을 과대하게 부각하고, 어떤 맥락은 배제하는 방식으로 축적되는 여러 차원의 권력 작용이 개입한다. 따라서 우리는 ‘청년’에 대해 스스로 과학임을 주장하는 지배적인 논의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물어야만 한다. 그 과학이 과연 무엇을 보지 못하게 하는 담론인지, 대안적인 과학은 어떤 방식으로 제기되어야 하는지에 관해서 말이다.

이 글에서는 청년실업률만을 예시로 들었으나, 이를테면 이런 질문들이 무한히 가능하다. 청년 내부의 집단 구분을 위해 흔히 사용하는 10세 단위, 5세 단위의 코호트 구분은 무엇을 부각시키고, 무엇을 가리는가? ‘청년이 공정에 민감하다’는 명제는 여러번의 설문조사를 통해 지지되고 기각되기를 모순적으로 반복하는데, 이러한 설문조사의 반복 바깥에서, 즉 통계적 여론 바깥에서 우리가 논의해야 할 다른 종류의 진실은 무엇인가? 비진학(고졸) 청년, 이주배경 청년, 유장애 청년, 탈가정 청년, 비-이성애자 청년, ‘남성’이거나 ‘여성’이 아닌 성별이분법 바깥의 청년 등 다양한 범주의 청년들이 실제 이미 존재하고 있는데, 왜 이러한 차이는 국가 규모의 사회과학 설문조사에서 정보로 수집되지 않는가?

내가 아는 ‘청년’을 연구하는 대다수의 전문적 통계 연구자들은 내가 통계에 대해 너무 근본적인 것으로 보이는 의문과 비판을 제기할 때조차 보통 그것을 함께 고민한다. 그러나 몇몇 경우에 있어 ‘청년’을 의심에 부치는 의견은 다소 황당한 재비판에 처하기도 한다. 사회과학이 합의하고 축적해 온 지식을 불신하는 태도가 옳지 않다거나, 아니면 당신 같은 담론/문화연구자들은 상대론의 함정에 빠져 있다는 이야기도 들어보았다. (‘포스트주의’에 대해 다들 얼마나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포스트주의의 문제를 들먹이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매우 흔한 화법이다.) 가장 최근의 경험으로는 청년을 위한 연구자들과 정치인들의 진심을 의심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 나는 생각한다. 내가 기존의 사회과학 지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은 왜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프레이밍되는 것인가. 이것은 왜 사회과학이 아니란 말인가. 근거를 바탕으로 불신하는 태도야말로 과학 진보의 시작이라고 한참 오랫동안 배워왔던 것 같은데 말이다. (또, 내가 기존의 ‘청년’에 대한 말을 의심하는 것이야말로 청년에 대한 진심이고 진정성이고 그런 것 아닌가?)

며칠 전 부르디외 읽기 세미나에서 동료들과 함께 읽은 <사회학자와 역사학자>의 내용은 이러한 나의 생각을 꽤나 지지해주고 있어, 마음 한 켠에 남았다. 부르디외는 스스로 “분류체계 자체를 분석 대상으로 삼고자 했다”고 언급하며, 대담자인 샤르티에는 “주어진 범주를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것으로 가정하고 무심코 사용”하는 일이 “명목론이 빠지기 쉬운 일종의 함정”임을 분명히 한다(37-38쪽). ‘청년’이라는 분류 범주 자체를 충분히 맥락화하지 않는 일이야말로 과학적이지 않은 태도라는 데 대해, 나는 부르디외는 물론이고 수많은 연구자들의 과학적 업적의 지지를 바탕으로 주장할 수 있다.

부르디외는 자신이 자신의 작업을 ‘과학’이라 하는 이유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과학적 논거를 가지고 나를 반박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과학’이라는 용어를 사용”(33쪽)한다고 말이다. ‘청년’에 관한 나의 주장, 혹은 좀 더 넓게 실증주의적 사회과학 바깥에서 기존의 지식 체계에 틈입하려고 하는 수많은 주장은 ‘과학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것도, 아니 이것이야말로 사회과학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대해 반박하려면 다시 한번 과학적인 방법으로 논의하시라. 갑자기 감정적인 태도로 항변하거나 언성을 높이는 태도는 과학적 태도가 아니다. 과학적 방법이 아니라 과학의 ‘권위’를 내세우는 방식 역시 과학과는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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