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은 개인적으로 처음 ‘저자’ 혹은 ‘작가’가 된 한 해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청년팔이 사회>라는 책을 6월 출간했고, 그렇게 많이 팔린 책이 아닌 데 비하면 정말 전국 곳곳에서 초청을 받아 북토크를 진행했다. (아, 그래도 1쇄는 다 팔았다(!)) 북토크는 아니지만 출간 이후 ‘청년 포럼’, ‘청년주간’, ‘청년의 날’ 같은 이름이 붙은 행사에 초대되는 일도 잦았다. 비슷한 이야기를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반복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체력적으로도 힘들었고. 그렇지만 최소한 개인적으로는 두 가지 정도로 분류할 수 있는 소득을 얻었다. 그래서 이 글은 그 소득에 대한 자랑이기도 하고, 앞으로 나와 우리의 문화연구에 대한 작은 성찰을 담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선 자신의 경험을 비판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하는 연구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는 기본적인 (이해)관심을 확인할 수 있어서 기뻤다. 사실 <청년팔이 사회>가 교양서로 분류되어 출간되긴 했지만, ‘세대 수행성’과 같은 이론적 개념들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어서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서 트레이닝을 받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어렵다는 반응들이 많았다. 그래서 북토크 초청 때마다 조금 쉽게 이야기해주시면 좋겠다는 제안이 많았는데, 물론 수행성 개념을 장황하게 설명하거나 한 적도 없지만, (고등학생 대상 강연을 갔을 때 빼고는) ‘이건 어려울거야’라고 지레짐작하면서 추상적인 내용을 제거한 적도 없었다. 그렇지만 거의 대부분의 청중들은 ‘나의 말을 더 이해해보겠어’를 느끼게 하는 초롱한 눈빛과 관심을 보여주었다.
내 북토크에는 보통 뒷풀이 자리가 많이 있었는데, 처음 보는 사람들과 술자리가 많아지는 것은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 피곤한 일이긴 했지만, 일단 공식적인 시간에는 못하는 자기 고민 이야기를 강의와 연관지어서 질문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좋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좋았던 것은 바로 내가 몰랐던 세계를 그들의 고민 듣기를 통해서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경상북도로 귀촌하는 청년들은 어떠한 상호작용을 통해서 마을에 자리 잡게 되는지, 그 과정에서 행정은 어떻게 개입하는지, 행정은 세대갈등을 어떻게 부추기고 어떻게 조정하는지, 상대적으로 농촌에 가까운 지역에서 왜 ‘청년 버스킹 지원사업’ 같은 것들에 예산이 쓰이게 되는지, 지금 청년으로서 지역 문화예술인을 자처하는 주체들의 중고생 시절에는 어떠한 경험들이 축적되어 있는지 따위에 대해 듣고 고민해볼 기회를 얻었다. 이런 세계는 내가 출판을 하고 그걸 계기로 돌아다니지 못했다면, 전혀 인지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평소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주로 교수 아니면 대학원생이고, 다른 세계를 온라인을 통해 만날 수 있다고들(ID:PeaceB) 하지만 그것 또한 SNS의 알고리즘상 상당히 편향되어 있을 것이니까.
연구자가, 특히 문화연구자가 나와 가장 다른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이렇게나 없다는 것은 개인에게도, 문화연구라는 영역 전체에도 상당한 불행이 아닐까. 이전까지 나 개인의 세계가 지금보다도 더 좁았던 것은 물론 내 특이성 때문도 있겠지만 돌아보면 제도적으로 ‘다른 세계와 조우’할 수 있는 유인이 거의 없었다는 점도 크다고 본다. 아마도 실적 쌓기 위주로 정렬되는 학술제도 및 대학원 교육 환경, 대학원생 개인에 대한 지원은 거의 없기에 맡을 수 있는 작은 아르바이트들을 하며 소진되게 되는 구조, 중앙 담론 위주로 세팅되는 연구과제 등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연구책임자로 할 수 있는 연구과제들을 수행하면서 전국의 청년활동가들을 만날 기회가 ‘연구비 지원’까지 받으면서 생겼던 것이, 또 단행본을 출간한 것을 계기로 이러한 이야기들을 더 들을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 엄청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사실 또 하나의 계기는 다큐멘터리영화 <땐뽀걸즈>를 본 것 때문인데) 정말 ‘문화연구 같은’ 문화연구를 할 수 있는 문화연구자가 되어 보고 싶고 그렇다면 그런 현장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굉장히 기초적이지만 간과하기 쉬운 생각으로 돌아오게 됐다.
문화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전국 단위의 어떤 이미 만들어진 담론에서 출발한다면, 그러니까 추상적인 문제의식에서 시작해 그것에 맞는 사례를 선정하는 방향으로만 작업이 이루어진다면 결코 더 좋은 문화연구가 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최근 많이 한다. 문화연구의 정전들이라고 불리는 작업들이 사실 굉장히 지역적이고 특수한 사례들에 대한 에스노그라피를 거쳐 오히려 이론화한 것에 가깝다는 점들을 떠올려 봤을 때 더더욱 그렇다. 호가트나 폴 윌리스 같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부르디외 같은 문화사회학자의 작업도 그렇다. 마찬가지로 내가 잘 모르는 세계를 탐구하는 일에서 시작하는 방향의 작업이 앞으로 필요하지 않을까, 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다. 쓰면서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이런 다짐을 이렇게 ‘박제’할 수 있는 것도 행운이고 기회이지 않을까 싶다. 흑역사를 자꾸 만들어야 역사를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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