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기] 누구의 일의 기쁨과 슬픔?


   2019년 가장 뜨거웠던 단편집인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을 읽었다.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하필 크리스마스 날. 마무리해야 할 연구보고서들을 잠시 잊어보겠다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가 아니라 혼자 작은 방 안에서 오랜만에 소설로 소확행을 누릴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예상대로 책은 매우 재밌는 편에 속했고, 어떻게 이런 문장을 써냈지 싶은 읽기의 즐거움이 있었다. 특히 작가가 현업에서 10년 가까이 근무한 ‘생활인’이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직장 썰’들이 녹아있어 30대 초반이 되도록 대학원만 다녀본 사람에게는 특히 흥미를 주었다.


   그런데 소설 맨 뒤에 실린 인아영 문학평론가의 해설을 읽으면서 고개가 갸웃해졌다. 장류진작가의 첫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리고 이 소설집이 일정하게 성취하고 있는 ‘센스의 혁명’이야말로 한국문학에 필요한 무엇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이 글이 취하는 스탠스가 왠지 모르게 아주 유려한 방식의 자계급중심주의 정당화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남성 중심적인 관념이면서 탈성화된 체 하는 ‘청년’ 기표가 문제적인 그 맥락과 동일하게, 실제로는 문화자본을 갖춘 고학력자 계급 중심적인 관념임을 숨기는 ‘서민’, ‘보통 사람’ 담론 또한 유해하다. 이 평론은 장류진 단편들의 주인공들을 계층 문제에 대한 고려 없이 섣부르게 “일의 기쁨과 슬픔을 조화롭게 이해하는, 이 시대 가장 보통의 우리들”이자 “여성, 청년, 노동자”로 선언하고, 이들이 우리 사회의 “을이자 약자”라고 정의한다. 이들이 취하는 삶의 태도가 ‘센스의 혁명’인 이유는 “특유의 생존감각으로 시스템을 체화하고 탄력적으로 구부려,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으로 논의된다.


   그러나 나는 이 인물들이 도저히 가장 보통의 약자인 청년 여성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 피디 지망생이었으나 진로를 변경하여 일반 기업에 취업한 경우, 대기업 여성 직장인, 스타트업 회사 막내 사원, (최근 신도시 아파트를 대출을 끼고 구매한) 백화점 매니저, 포털 사이트 관계사 사무직, 변호사 등 <일의 기쁨과 슬픔>의 여러 단편에 등장하는 여성 주인공들은 묘하게 계급적으로 동질적이다. 이들의 배경이 하나하나 꼼꼼히 서술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중상위권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일’을 통해서 스스로의 가치를 실제로 높일 수 있는 객관적인 가능성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서 상당히 높은, ‘동질혼’ 내지는 ‘상승혼’을 통해서 결혼이라는 계기를 조금 더 나은 삶으로 가는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최소한 교육과정에서 ‘노력’하여 이룩해 놓은 스펙이 현재나 미래의 조금 더 좋은 조건이라는 보상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가능한 계층이라는 점이 분명해 보인다.


   나는 평균에 비해 좋은 조건에 있다고 해서 그들의 삶의 고뇌, 생존 전략, ‘기쁨과 슬픔’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이것은 중요하고, 아직도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기에 더 다루어져야 할 부분이고 그래서 <일의 기쁨과 슬픔>은 충분히 흥미로운 단편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삶을 “가장 보통”의 청년 여성이라고 선언하는 문제는 전혀 다른 문제다. 조금 과하게 말해, ‘SKY 대학생’이 ‘88만원 세대’의 주인공이 자신인 양 구는 것이나, ‘청년 남성’이 자신이 겪는 문제가 가장 고통스러운 ‘청년 문제’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가장 보통의 우리들”을 다른 삶에 대한 고려 없이 자계급을 기준으로 설정하는 문장은 쓰여서는 안 될 문장이다. 해설은 이 단편들 속 인물이 한국문학에서 익숙하게 봐 왔던 인물들과는 다르게 비대한 자아가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어쩌면 결국 다른 삶에 대한 고려 없이 자기 삶에 매몰되어버린다는 점에서 이는 또 다른 종류의 비대한 자아일 수 있다.


   이 책이 불티나게 팔리는 현상을 목격했고, 또 즐거운 독서 경험을 한 사람으로서 앞으로 기대되는 것은 장류진 작가가 앞서 언급한 ‘동질적인 청년 여성’ 경험 바깥의 삶을 어떻게 다루어 갈 것인지에 관한 점이다. 장류진의 인물들이 이러한 여성 타자를 “예상치 못한 변수”나 “장애물, 걸림돌”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소화하게 될지 하는 것이다. 이미 <일의 기쁨과 슬픔>에는 이미 ‘다른 여성들 간의 조우’가 본격적이지는 않지만 제시되고 있다. 신도시 아파트를 소유한 무자녀 기혼 여성이 전통적 가치관을 가진 기성세대 '가사도우미'와 마주하면서, 성매매 자체에 대한 심미적 반감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이 ‘성매매 여성’을 인식하게 되는 상황,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냥 즐겁게 읽고만 넘어갈 수 있는데, 괜히 이 소설에 딸린 해설과 이 소설 자체에 약간의 정념을 쏟게 된 이유는, 아마도 크리스마스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필이면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해설까지 다 읽고 나서 켠 인스타그램에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배우자나 연인, 가족들, 친구들과 음식, 관광, 호텔, 콘서트, 배달음식과 같은 여러 가지 서비스를 소비하면서 즐거운 표정을 짓는 사진들을 끝없이 볼 수 있었다. 인스타그램을 보는 것만으로는 그 서비스를 누가 제공하고 있는지를 상상할 방법이 없었다. 아마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서비스 소비자들은 ‘일의 기쁨’을 누리고 있을 테지만, 그 시간 서비스 생산자들은 ‘일의 슬픔’을 누리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서비스 생산자들도 청년이고, 또 청년 여성이다. 하지만 그들의 ‘일의 기쁨과 슬픔’이 재현되어 서비스 소비자들에게 닿는 일은 드물다. 이를테면 1년 내내 일한 비싼 케이크 가게에서 영업 종료시간 할인을 이용해서 연말에라도 케이크 하나를 작은 방에 들고 가 나누어 먹고 싶은 청년 여성 감정 노동자의 마음 같은 것(서유미, ‘에테르’), 일에 슬픔만 있고 기쁨이 없는 누군가의 마음 같은 것은 말이다. 서비스 제공자와 구매자의 세계로 나누어지고 있는 듯한 이 세계에서 최소한 내 일의 기쁨과 슬픔이 보편적인 것이라고 선언하지 않는 정도의 윤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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