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홍단비
노동이나 청년에 대한 연구를 하다 보면 가장 많이 접하는 단어 중 하나가 이행기transition period다. 이를테면 가족에의 의존에서 독립으로 향하는 일련의 과정을 이행기라는 개념으로 설명해볼 수 있다. 사실 과도기라는 단어의 의미와 크게 다른 게 무엇이냐 하면 깔끔하게 대답하기 어렵긴 하지만, 아무래도 과도기에서는 불안정함에 방점이 찍히는 반면 이행기는 상태가 바뀌어 가는 ‘도중’을 더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하고 얼버무리듯 이야기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이행기에 함께 따라붙는 개념에 생애주기life cycle가 있는데,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기간 동안을 몇 가지 특정 기준으로 크게 구분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나뉜 각 단계 안에는 한 사회가 개인이 수행하도록 기대하는 역할이 있고, 이를 발달과업development task이라고 한다. ‘맡은 역할’을 잘 해내려면 ‘해야 하는’ 과업이 있다는 뜻이고, 보통 이는 졸업(이수), 취업, 결혼 등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할을 부여받은 누군가가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모두가 소위 말하는 정상생애주기나 사회적으로 바람직하고 안정적인 궤도에 들어서려면 착실하게 ‘시기에 맞는’ 과업을 달성할 필요가 있다. 과거 내가 인터뷰에서 만난 인터뷰어 중 한 명은 이를 두고 ‘제철 과일’로 표현한 바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같은 시기와 제철은 순리대로 찾아오는 반면, 그 시기의 과업 달성은 각별한 노력이 있지 않고서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게다가 그를 위한 기회가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내가’ 충분히 ‘그런 삶’을 살 ‘자격’있는 사람임을 증명하는 일이 이행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이미 연구되고 이야기된 바 있듯이 이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은 불안, 자괴, 좌절 등을 경험하면서 극심한 에너지와 감정의 소모를 겪는다. ‘나’의 스펙을 다듬고, ‘나’의 성공을 꿈꾸고, ‘나’의 안정을 도모하는데 왜 정작 ‘나’는 삭아가는 느낌이 들까? 그런 앞날이 오리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그러니 만약 그 모든 과업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나면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일만 남게 될까? 기실 한 쪽에 돋보기를 들이대고 연구하고 있는 연구자로서의 나조차도 당연히 그렇겠지, 하고 생각하곤 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편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착실하게 정형화된 이행기를 밟아온 이들에게도 혼란의 이행기를 보내는 이들에게 만큼이나 오롯이 혼자의 힘으로는 견뎌낼 수 없는 힘듦이 있다는 것, 이 현실을 알게 된 계기가 불과 얼마 전에 있었다. 서울 한 지역에서 문화활동을 하고 있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볼 기회를 얻게 되었던 것인데, 지금 그들은 서로 다른 모습의 이행기를 보내고 있다. 누군가는 아담한 공간에서 식물과 정원을 가꾸었고, 또 가족을 꾸린 어머니들은 아이들과 함께 다양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들에게는 ‘그 공간’ 밖을 나서면 감내해야 하는 고충과 고통이 있다. 남들보다 뒤처져 있는 건 아닌지 하는 고민, 끝이 없는 반복에서 오는 무기력감, 우울, 서울이라는 타지에서 느끼는 외로움. 어떻게 활동을 시작하게 됐냐는 질문에 대해 그들은 이렇게 자신만의 이유들을 말했다. ‘제철’을 놓쳤다는 조급함이나, 지리멸렬한 집안일에 더해진 육아로 인해 묵중한 책임감과 권태가 함께 다가오기도 했다고. 그래서 그들은 지금의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지극히 사소하고 지극히 일상적인 일들이지만, 외려 내가 괜찮지 않으면 조금도 돌보지 못하는 것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그 순간들은 혼자 꾸리는 것보다 누군가와 함께 할 때 더 빛난다는 것도 깨달았다고 말했다.
어쩌면 지역문화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로 이와 같은 ‘나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의아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나 역시도 그런 대답을 예상하고 인터뷰에 임하지 않았기도 했고, 그런 활동이야말로 내가 속한 지역의 문화 발전에 기여한다든지 아니면 일종의 공동체 활동을 통해서 다른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고 ‘돌보기’ 위해 행하는, 일종의 이타적인 심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길 그 활동을 통해 ‘나 스스로’를 돌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타인과의 유대를 도모하고 어려움에 공감하면서 일종의 치유를 스스로 경험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선사하는 나눔과 연대의 밑거름이 되고 있는 셈이다.
따지고 본다면 ‘간극’일 테다. 현장에서 만난 다양한 이행기는 사회가 요구하는 단일한 모습이 아니고, 지역발전에 초점을 맞춘 문화활동에서 역시 지역색은 배경으로 자리한다. 이름도 나이도 묻지 않는 익명의 참여에는 필요한 자격 같은 것이 없다. 또한 그들이 ‘창작’한 ‘선물’을 받기 위한 조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지역은 더 이상 경계로 기능하지 않는다. 나의 아픔과 외로움의 생활에서 시작된 문화활동은 곧 나를 돌보는 것으로, 또 ‘나-들’을 돌보는 것으로 그 영역을 넓혀간다.
그런고로 이 모든 삶들이 ‘이행기’라고 불릴 수 있는 이유는, 삶을 오로지 불안정한 과도기만으로 보지 않기 위한 노력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으로 부여된 과업을 뛰어넘고, 나의 계발이 아닌 자발에서 비롯한 창의를 행하며 그 속에서 그동안 놓쳤던 샛길을 걸어보는 일인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사회 대 개인, 정치와 생활이라는 이분법적 논의 속에서 흐려졌던 ‘나’라는 주체의 자리가 생겨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사회와 개인의 사이에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중간의 영역으로 자리하는 공동체의 개념이 아니다. 다시 말해 보살핌이나 연대, 공감이 자체적으로 공동체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방식의 사고가 아니라, ‘나’의 필요와 ‘나’의 열망에서 비롯된 움직임이 비로소 공감과 유대, 연대로 이어지고 있음이 이러한 지역문화활동을 매개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여기서 말하는 치유는 비단 더 멋지고 더 나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내가 되기 위한 발판으로 귀결되지 않고, 또한 사회 발전의 자양분으로만 남는 것도 아니다. 수많은 ‘나-들’의 연결로 이루어진 이 공동체의 형성은 일상과 삶의 ‘도중'에서 스스로와 타인의 교감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그동안 어깨에 짊어졌던 과업으로 패여 있던 결핍을 채우는 과정이다. 결국 이 안에서 ‘나’는 나아가(進步, 진보)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治愈, 치유)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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