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낸다. 특히나 마감이 있는 일을 해야할 때면 열린 공간보다 고양이와 단 둘이 살고 있는 나의 집을 고집한다. 외부의 시선이나 간섭으로부터 고립된 이 공간에서의 작업은 오롯이 나 자신의 생각에 집중할 수 있고 내가 필요로하는 것을 그때그때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단절이 꼭 효율적인 것만은 아니다. 무심코 시작한 웹툰을 기어코 정주행해버릴 수도 있고, 수많은 선행연구와 복잡한 이론들에 압도되어 한 문장도 뽑아낼 수 없을 때도 있다.
허엇!!!
모니터 앞에서 온갖 생각들로 아득해지는 순간엔, 어김없이 고양이 녀석이 화면 앞으로 뛰어들어와 나를 놀래킨다. 보드랍고 따뜻하고 말캉한 녀석을 끌어안으면 무언가 써야한다는 강박과 긴장도 사라진다. 녀석의 시선, 울음소리, 냄새, 흔들리는 꼬리가 지금 이 녀석에게 필요한 것을 내게 알려준다. 나는 익숙하게 녀석의 목덜미를 긁어주고, 불편해하는 것들을 치우다보면 일상의 감각을 되찾는다. 굳이 언어가 아니어도 우리는 크고 작은 움직임들로 소통하고 서로의 곁을 지켜왔다.
이즈음에서, 나는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에게 몇가지 질문을 던져볼까 한다. 앞서 서술했던 나와 고양이의 일상에서, 특히 우리는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도 서로를 이해하고 있고, 고양이 덕분에 심심함이나 외로움을 덜었다라는 말로는 일갈할 수 없는 내밀한 관계를 구축했다고 생각하는 나의 인식을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고양이는 내 가족이다'라는 나의 선언에, 당신은 '반려(동물)'이라는 기표를 거치지 않고도 거부감없이 인정해줄 수 있을까?
확실히 최근엔 '반려동물'을 가족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예전처럼 낯설지 않다. 특히 '반려'라는 표현은 이전엔 '반려자'처럼 가족을 이룰 사람에게만 사용해왔지만, 근래엔 동물, 식물, 곤충, 심지어 기술 등에도 쉽게 덧붙여진다. 하지만 이들을 '가족'이라고 명명하는 순간 그 누구도 의인화(anthropomorphism)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에게 가족은 너무도 인간중심적인 사회 범주여서, 동물을 가족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인간과 동물간의 종(species)의 경계를 더 의식하게 만든다. 가족이라는 표현은 존재 자체를 정의하기보다는 둘의 친밀한 관계를 지칭하는 수식어로 의례 이해되는 것이다. '고양이와 종종 대화를 한다', '고양이가 나를 이해해준다'와 같은 진술은 또 어떠한가.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주체 간의 의사소통 자체에 주목하기보다는, 몇몇 유별난 동물애호가들의 애정의 과시 쯤으로 이 경험들은 축소되어 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반려동물은 인간이 독식한 '사회'공간에서의 동물과 인간의 관계 변화를 증후적으로 보여주면서도 실재로는 여전히 인간우월주의 혹은 인간예외주의 (human supremacy or human exceptionalism)를 자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이보그 선언'으로 유명한 미국의 비판 구성주의 페미니스트 다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반려동물 선언(2003)을 통해 반려문화 자체에 대한 이론적 관점을 제시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출현과 역사를 같이하는 개는 인간과의 부단한 훈련을 통해 공현존, 공진화해왔다. 그러나 인간, 기술, 동물이라는 사회적 경계를 가르는 인간중심주의는 이 뒤엉킴을 왜곡해 동물들을 살게하고 죽게 내버려두는 가혹한 생명권력의 자장 내로 계속해서 내던진다. 그녀는 자연과 문화,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기존의 선택적, 도덕적 결합을 문제시하면서, 사실 지금 현재의 우리의 역사가 종을 가로지르는 개방적이고 실험적인 생성/되기(becoming)이며, 이 종횡단적 사회성(cross-species sociality)이 계속해서 전화해나가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녀의 이 반려 선언과 공명하는 것이 근래 인문학에서의 포스트휴먼에 관한 논의이며, 인문지리학과 탈구조주의 인류학에서 제기되는 '인간너머 세계 (more-than-human world)'로 확장되는 시선들이다.
근래 우리 사회의 반려동물문화에는 여전히 인간중심주의가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 일례로, 반려종은 개와 고양이 등 사람들이 선호하고 또 시장에서 거래가능한 몇 몇 종으로 제한된다. SNS 상에서는, 사람들만큼이나 자주 미용실에 다니고, 멜빵바지와 넥타이로 멋을 낸 반려종이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인간화된 반려동물의 존재와 위치로 인해 인간과 동물의 공존을 둘러싼 갈등이 일상화되고 공식화되고 있다. 반려동물이라는 위치에서 배제되거나 내팽겨쳐진, 아감벤이 말하는 '예외 상태'의 유기동물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감각이 달라지고 있다. 인간 너머의 세계라는 것이 현실 정치에서 점점 더 민감한 문제로 부상하고 있는 셈이다. 사회의 구성, 존재 자체가 '되기' 즉 인간과 인간 아닌것들의 관계 속에서 계속 변화해가고 있는데 우리의 인식이 기존의 이분법에 가로막혀 있는 그대로를 직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다가오는 신문연의 <연합신세 G>에서 이 문제의식을 함께 발전시켜나갈 벗들을 만나고 싶다. 수많은 그들의 고양이와 개들과 함께라면 더욱 즐거울 것 같다. 으냐아아아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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