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손발이 저리고 일주일에 며칠은 꼭 목과 어깨에 담이 왔다. 응급실에 가야할 만큼 아픈 것도 아니고, '어른'이 되면 다들 이 정도 불편함은 견디며 살지 않나..라며 계속 병원행을 미뤘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서른 즈음의 나는 졸업도 했고, 뭔가 다시 시작해야한다는 마음에 쫓겨 정작 내 몸 여기저기에서의 고통을 찬찬히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아침부턴 불편함 정도가 아니라 발끝이 갈라질 것만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뼈가 계속 자란다구요?"
한쪽 벽에 걸린 엑스레이 촬영본들을 살펴보면서 의사는 디스크, 척추 측만, 일자목.. 어쩌고 어쩌고.. 여러 병명들을 나열했지만 당장 내 귀에 꽂힌 말은 한 쪽 발의 뼈가 자라고 있다는 진단이였다. 성장기도 아닌데 계속 자라고 있다니 황당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내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돌연변이 같다는 생각에 불안해지기도 했다.
'아프다'라는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니 뭔가 심각한 상황인 걸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근데 주변에 걱정을 끼칠 정도는 아니고, 그저 병원을 오가고 운동을 시작하면서 질병이나 몸에 대한 나의 생각들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한번쯤 정리해보고 싶었다. 더 솔직하자면, 지금껏 나는 인간/자연, 정신/물질 등의 이분법을 비틀어보자-그런 연구 관심이 필요하다고 재차 피력해왔다. 하지만 연구자가 아닌 일상의 나는 이 인식틀에 철저히 가로막혀 있고 되려 강력하게 고수해왔음을 지난 몇년간의 병원 경험을 되짚는 과정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보자.
처음 나의 상태에 대한 '진단'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나는 '몸', '질병'을 대하는 의사의 관점이 나와 뭔가 다르다라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줄곧 '아프다'라는 통증을 느껴왔지만 이를 '질병'으로 확신한 것은 엑스레이로 촬영된 몸을 확인하고부터다. 반면 의사는 언제부터 어떤 부위들이 어떻게 아팠는지, 빈도나 통증의 정도를 집요하게 물어보며 여러 검사를 추가해 병을 진단했다. 그는 가시적으로 확인된 사실(내 척추가 몇 밀리미터 휘어졌는지, 얼마나 발뼈가 자랐는지)이 아니라 당사자가 그로 인해 얼마나 통증을 느끼는지 그 정도에 따라 처방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이해하길 바라는 듯했다.
이 대화에서 논의된 소재들을 소위 문화적인 것, 사회적인 것들로 바꿔본다면 어떨까? 병원에서 나는 내가 느낀 통증을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으로 너무 쉽고 당연하게 구분 짓고, 질병을 특정한 상태나 부위(엑스레이 촬영본에서 확인한 부분)로 제한지었다. 만일 내가 논의해야하는 대상이 의학적 세팅에 놓인 몸이나 질병이 아니라 상징폭력과 같은 것이였다면 나는 과연 이렇게 간명하게 판단하고 말할 수 있었을까?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을 너무 납작하게 이해하고 있는건가? 그렇다면 질병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반추해보자. 나는 눈으로 확인한 부분을 질병이라고 확신한 순간 이것을 내몸에서 제거하거나 교정 등의 처치로 회복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반면 통증의 정도, 빈도를 통해 몸 여기저기의 질병을 추적해 내는 의사에게 그것은 경계를 획정할 수 없는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듯했다. 변화한다는 건 돌이킬 수 없고 '회복'된 지점을 고정시킬수 없다. 의사는 만성질환을 치료한다는 것은 결국 악화와 완화를 오가는 통증을 '관리(care)'하는 것이라고 무심히 말할 뿐. 그러고보면 질병은 단순히 치료의 대상이 되는 객체가 아니라 통증의 가감을 만들며 나를 바꿔내기도 그것이 바꿔지기도 하는 나의 신체에 더불어 가는 행위소(actant)쯤인 걸까. 질병이 나와 곁에 더불어(withinn)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이제 병원을 오가는 나의 일상과 언제나 함께한다는 의미다. 한편 시간의 축으로보자면 나에게 질병은 이제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계속해서 의식하게되는 잠재적인 것 가상의 것으로도 존재한다. 특정할 수 없겠지만 그것은 이제 나의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계속 존재하는 것이다.
소소한 투병기, 병원 에피소드라고 할 법한 평범한 이야기를 학술적인 수사들로 각색하려는 것은 아닐까 글을 쓰는 내내 이 의심을 떨칠 수 없었다. 몸, 질병에 관해서라면 의류인류학자이자 철학자인 아네마리 몰(Annemarie Mol, 2002)의 민족지 연구나 몰의 문제의식을 노동조합의 생활운동으로 확장한 김관욱(2019)의 연구를 소개하는 정도여도 충분할 것이란 생각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에 관한 이야기를 써본데는, 두 학자가 (서구)의학의 한계를 짚어내거나 거리를 설정한다면 나에겐 병원 경험이 내게 익숙한 인식틀에 균열을 만들고 몸과 질병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를 자극했던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돈과 시간이 언제나 병원을 가는 걸음을 무겁게 하지만, 일단 병원에 들어서면 나는 여성도, 연구자도, 시민도 아닌 그저 '통증을 겪고 있는 몸' 으로서 맘껏 아프다 이야기하고, 소리를 내고, 얼굴을 찌푸리며 '에잇. 대체 몸이 왜 이런거냐' 물리치료사에게 한탄도 할 수 있다. 아플때 갈 수 있는 병원이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지 않은가) 이런 경험이 모든 의료 현장에 일반화 할 수 없고, 이 글이 파편적 인상에 의존한 터라 뭔가 아직 더 써야할 이야기가 많이 남은 것 같지만. 일단 병원 이야기는 여기까지.
Mol, A.(2002) The Body Multiple: Ontology in Medical Practice,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김관욱(2019). '여러 몸'의 진짜 주인되기: 노동운동으로서의 생활운동에 대한 경험철학적 민족지. <한국문화인류학> , 52(3), 273-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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