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을 어떻게 연구할 지 연구 계획을 설계하면서의 고민을 담아보겠다고 연구노트를 시작한지도 꽤 긴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공개하지 못했던 것들까지 포함해도 다섯을 넘기지 못한다는 것이 무척 멋쩍지만, 일단 생각이 멈춘 지점들에서 다시 이 글을 시작해봐야겠다. 지난 글에서 나는 사회 공간 안에서 반려동물과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이들이 사회의 여러 공간들에서 갈등하는 양상, 양가적 혹은 다중적인 입장들이 경합하고 연합하는 과정에 주목해보겠다고 밝혔다. 이번 노트에서는 나의 연구가 왜 반려동물이 아니라 '반려동물-인간'이라는 결합의 단위에 주목하게 되었는지, 연구대상에 대한 나의 이 구상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혹은 어떤 고민 속에서 나온 것인지를 공유해보고자 한다.
반려동물은 인간과 동물이라는 통념적인 분류의 경계에 존재한다. 그들은 동물이지만 인간과 같은 이름을 갖고 같은 공간에 정주하며 '가족'으로 함께 살아간다. 내가 처음 반려동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이 역치성(liminality)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지식의 세계에서 인간과 자연이라는 구분은 자연과학/인문사회과학처럼 자명하게 나뉘어 있지만, 실제 우리의 일상에서는 반려동물의 사례처럼 그 경계가 모호하다. 자연(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생물학적인 ‘종차’를 상식이라고 한다면 반려동물의 존재는 이 구획을 교란시키는 하나의 '변칙(anomaly)'이다.
처음 반려동물을 연구해보겠다는 아이디어는 이 '변칙'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집중해 있었다. 일상의 소소한 실천들을 대문자 문화에 대한 저항, 비일관된 임기웅변 등으로 설명했던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의 논의를 반려동물문화에 적용해보는 것이랄까. 그가 도시의 뒷골목을 휘저어 걷는 걸음에서 일상에 대한 ‘상이한’ 경험들의 가능성을 읽어냈듯, 나는 이 변칙들에서 오늘날 우리가 동물들에 대해 공유하는 감각(정동?)의 변화를 보여주고 싶었다. 연구의 얼개를 잡았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반려동물과 오랜 기간 생활해온 사람들, 특히 한국 사회에서 반려동물의 양적 팽창에 주요한 요인으로 꼽히는 비혼, 1인 가구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수소문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연구대상을 선별했던 조건들이 연구자인 나에게 모두 해당하는 터라, 나는 연구 대상을 타자화하지 않고 현상과도 유리되지 않을 수 있도록 자문화기술지를 작성하면서 이 인터뷰를 활용할 생각이였다.
5명쯤 인터뷰를 했을 무렵이였을까. 나는 인터뷰이들과의 대화에서 '가족', '책임', '사랑' 등 몇몇의 어휘들이 반복될 뿐 '말해진 것'들 안에서 내가 어떤 '변칙'을 찾아낼 수 있을지 막막한 기분에 빠졌다. 무엇보다 당시의 나는 ‘반려동물'은 동물을 '의인화(anthropomorphism)'한 표현일 뿐 일반적 의미의 가족일 수 있느냐는 지도교수님의 질문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반려동물과 산다는 것을 '변칙'으로 판단하는 것에는 거리낌이 없었으면서 나는 왜 이를 '의인화'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반려'라는 말에 내가 너무 심취한 나머지 연구자로서의 '객관적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것일까? 나는 인터뷰를 중단하고 이 질문들을 곱씹기 시작했다. 반려동물가족이 정말 허구적 상상에 불과한 것인지, 내가 설명하고자 하는 '변칙'이 결국 이 문학적 상상 안에서 모두 설명가능한 것인지, 뭣보다 가장 큰 고민은 연구대상인 내가 ‘의인화’라고 의식해본 적이 없는데 연구자라는 위치에 있다는 것만으로 급작스레 이 개념을 민족지에 '삽입'해야 하는 것인지, 이 모든게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런 고민들을 할 때 내 관점을 되짚어보고 다른 방향을 모색해볼 실마리가 되어준 것이 하대청, 이강원, 임소연(2015)의 '재현적 증거에서 존재론적 증거'라는 글이다. 이들은 민족지(문화기술지)가 현장을 목도한 인류학자에 의해 재현되는 것으로 생산되는 한, 그것은 "실재 즉 세계 자체가 아니라" 지식인(인류학자)이 각색한 "세계에 관한" 진술일 수 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연구자가 자신의 위치에서 민족지의 부분성, 정치성을 드러내는 성찰을 아무리 감행한다고 하더라도 현지인의 진술은 연구자의 시선과 대등하게 배치될 수 없다. 이같은 비판과 함께, 저자들은 민족지 작업의 새로운 방안을 제시한다. 현지인이 말한 것과 연구자의 판단을 위계화하지 않고, 현지인이 사실을 정의(발명)하고 사용하는(혹은 경합하는) 방식과 이로부터 현장이 변화해가는 과정을 민족지에 담아가는 것. 이 경우 민족지는 더이상 연구자에 의해 실재를 '재현'한 기록물이 아니라, 기존의 재현들에 차이를 (현지인과 더불어) 만들어내는 장소가 된다.
하대청 외(2015)의 글은 ‘의인화’라는 비평이 내게 던진 갈등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나는 연구자 자신의 경험을 연구 현장/대상으로 삼는 자문화기술지에서조차 현장의 나와 지식인으로서의 나를 분리시켜야한다는 강박에 빠져있었던 셈이다. 내가 연구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변칙’이 생성되고 있다는 것인데 ‘실재와 재현’이라는 구도에서 민족지를 작업하는 한 나는 ‘의인화’된 현상을 설명할 뿐 ‘변칙’ 자체를 진술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판단이 들면서 나는 묵혀두었던 나의 글과 인터뷰를 다시 살펴보았다. 가족이라는 말을 반복할 뿐이라며 답답해했던 녹취록에서 나는 가족이 되었다는 경험 자체에 정말 내가 충분히 주목하고 있었던 것일까를 되물었다. 나는 반려동물과 가족이 되었다는 '정의'가 그들의 삶을 어떻게 변형시켜 왔는지, 그 경험으로 무엇을 사유하게 되었는지 문답했어야 했다. 너무 추상적인가? 내가 생각한 사례는 이런것이다. 예를 들어 강아지와 함께 아파트 단지를 걸어가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강아지와 보호자는 '가족'이라는 발명/정의로 작동하는 '개-인간'이라는 새로운 존재 단위, 실천의 단위이다. 이들에게 아파트의 산책로는 자신들과 다른 존재 즉 인간들을 마주해야하는 공간이다. 강아지가 목줄을 차고 있는지, 달려들지는 않을지 주저하는 발걸음과 눈짓들을 마주할 때마다 '개-인간'은 이 사회가 동물에 배타적인 인간들'만'의 공간이라는 것을 체감하게 될 것이다. 강아지가 목줄이나 입마개를 해야하고 보호자가 주변을 계속 살펴야한다는 규범/사회적 기대는 '개-인간'이라는 새로운 존재 단위에 적용된다. 변칙은 가족이라고 정의되는 인간과 동물의 존재 단위가 수행하는 실천들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
여기까지가 '반려동물과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 내가 지금껏 고민해온 연구틀-도구상자-의 대략적인 그림이다. 사실 이 구상도 꽤 해묵은 것이다. 인류학 강의를 듣거나, 신문연 세미나를 진행하며 간혹 이 아이디어를 주변과 공유하긴 했지만, 여전히 다른 연구자들이나 글을 읽을 사람들에게 이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조심스럽다. 연구 현장이나 범위를 어떻게 특정하거나 한정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여전히 고민이 많다. 뭐라도 해야지 맘 먹는게 한 두번으로 끝나는 건 아닌가 보다. 고양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구에 좀 더 힘을 내야지! 아자자 !!
*인용한 연구
하대청, 이강원, 임소연 (2015). 재현적 증거에서 존재론적 증거로. <비교문화연구>, 21(1), 133-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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